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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茶人기행|야은 길재

눈 펄펄 흩날릴 때 차를 즐기노라

눈 펄펄 흩날릴 때 차를 즐기노라

눈 펄펄 흩날릴 때 차를 즐기노라

충남 금산의 ‘청풍서원’.

현재 가볼 수 있는 야은(冶隱) 길재의 유적지는 두 곳이다. 한 곳은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경북 선산이고, 다른 한 곳은 아버지가 금주지사로 부임했던 충남 금산(옛 금주)이다. 두 곳 중 선산이 더 유명한 것은 길재가 낙향해 김숙자(김종직의 부친) 같은 후진을 양성, 영남 사림의 비조(鼻祖)가 됐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금산은 길재가 31세에 결혼한 곳이며, 지사로 부임한 아버지가 2년 만에 별세하자 시묘살이를 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 나그네는 금산 청풍서원으로 가고 있다. 길재의 영정이 봉안된 청풍사(淸風祠)를 둘러보고 싶어서다. 청풍사는 불이영당(不二影堂)이라고도 부른다.

사철 푸른 차나무는 뿌리가 곧게 뻗는 직근(直根)의 성질이 있다. 차 꽃은 모든 꽃이 시드는 가을에 피기 시작, 한겨울에도 볼 수 있다. 차 잎은 흐린 정신을 깨어 있게 하고 향은 그윽하고 향기롭다. 그래서 충절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선비들이 차나무를 좋아했던 것일까.

고려 기울자 선산으로 낙향 … 후진 양성 진력 영남 사림의 비조

길재는 고려의 운명이 기울자 가족을 이끌고 낙향, 산가(山家)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산다. 산가는 세 칸 정도의 초라한 초가였으리라. 산가를 지어 은둔한 지 10여년 뒤 그는 산중 은둔 사계를 노래한 ‘산가서(山家序)’라는 산문을 짓는다. 나그네가 ‘산가서’를 주목하는 것은 차 살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회오리바람 일지 않으니/ 비좁은 방도 편안하고/ 밝은 달이 뜰에 다가오니/ 홀로 느리게 거닌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이따금 베개를 높여 꿈을 꾸고/ 산눈(山雪)이 펄펄 흩날릴 땐/ 차 달여 혼자 마신다(飄風不起 容膝易安 明月臨庭 獨步徐行 饋雨浪浪 惑高枕而成夢 山雪飄飄 惑烹茶而自酌). ’

길재는 어린 시절부터 차를 알았던 것 같다. 11세에 도리사로 들어가 글을 배웠다고 하니 그 나이라면 노스님들이 차를 마실 때 차 심부름을 하는 다동(茶童)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해평 길씨인 길재의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과 말년에 은거했던 산 이름을 붙인 금오산인(金烏山人). 도리사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해 18세에는 박분에게 ‘논어’와 ‘맹자’를 익힌다. 그리고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 정몽주, 권근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깊이를 더한다. 공민왕 24년(1374) 생원시에, 우왕 9년(1384)에는 사마감시에 합격한다. 2년 뒤 진사시에 급제해 청주목사록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같은 마을에 살던 이방원(조선 태종)과 두터운 교분을 쌓는다. 이후 성균학정(成均學正),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어 태학 생도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창왕 1년(1389)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이듬해 노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제수를 받았으나 은거할 뿐이었다. 나라가 바뀌어 정종 2년(1400) 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소를 올리고 거절한다.

‘(전략) 나가고 물러남을 생각하매 실로 명분과 예의의 경중에 관계된 일이오라 신이 비록 두터운 낯짝으로 영광을 받잡고자 한대도 남들이 반드시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것이옵니다. (하략)’

청풍사가 자리한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不二里)에 도착하니 길재의 충절이 다시 느껴진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청풍서원의 편액 글씨를 보는 순간 길재의 도학정신과는 어딘지 동떨어진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쿠데타로 집권했던 박 대통령의 공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길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다.

☞ 가는 길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에서 금산 나들목으로 나와 금산에서 무주 방향으로 15km쯤 가면 왼쪽 길가에 길재의 영당인 청풍사가 나온다.



주간동아 2006.02.21 523호 (p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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