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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貧者들의 삶을 바꿔요”

  • 송문홍 기자

“인문학은 貧者들의 삶을 바꿔요”

“인문학은 貧者들의 삶을 바꿔요”
미국 작가 얼 쇼리스(69) 씨는 1995년 미국 뉴욕 인근의 교도소를 방문해 한 여성 죄수와 마주 앉았다. “사람들은 왜 가난할까요?” 그가 물었다. “우리에겐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는 다소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그가 “정신적 삶이 뭐냐”고 다시 묻자 여죄수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인문학(Humanities)을 말하는 거군요.” 그러자 여죄수는 지구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래요, 얼. 인문학이요!”

이 대화는 쇼리스 씨가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창설한 계기가 됐다. 클레멘트 코스는 노숙자, 전과자, 마약 복용자 등 최하층 빈민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윤리·철학·예술·역사·논리학·문학 과목을 1년 동안 가르치는 과정. 밑바닥 계층에게 성찰적으로 사고하고 자율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줘 스스로의 힘으로 절망스런 처지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취지다.

경기문화재단과 성공회대학교 평생학습사회연구소,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의 초청으로 방한한 얼 쇼리스 씨를 1월19일 밤늦은 시각에 만났다. 형형한 눈빛에 단아한 체구의 노(老)신사는 연일 계속된 바쁜 일정에도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세미나는 제게도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클레멘트 코스와 한국의 노숙인 인문학 강좌에 대해 폭넓은 의견 교환이 있었지요. 클레멘트 코스는 현재 북미, 호주, 아시아 등 3개 대륙에서 55개 코스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난 11년간 전 세계에서 4000여명이 이 코스를 졸업했고, 최근엔 한 해 신입생이 1200명에 이릅니다.”

그가 자신의 ‘포커 친구들’ 몇 명과 의기투합해 첫 코스를 시작했을 때 주변에선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글을 읽을 줄 아는 수준의 학생들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니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크라테스식 대화와 토론식 수업을 놀랄 만큼 잘 따라왔다고 회고했다. 성과 또한 눈부셨다. 첫 1년 코스를 시작한 31명 중 17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그들 대부분은 뉴욕 바드대학의 정규 학점도 취득했다. 이들 중 2명은 훗날 치과의사, 1명은 간호사가 됐고 전과자였던 한 여성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에서 상담역이 됐다고 한다.



“인문학은 틀에 박힌 사고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남들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과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 시를 음미하는 법, 교향곡을 즐기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새로 시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좋은 시를 읽고 위대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새로 시작하는 일이며,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인문학을 통해 습득한 ‘새로 시작하는 자세’는 개인의 역경을 극복하는 데도 결정적인 힘이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 그 지론은 클레멘트 코스를 통해 멋지게 입증됐다. 한국의 경우 지난해 클레멘트 코스를 도입한 ‘성 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강좌’는 17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는데, 전원이 노숙 생활을 청산했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인문학은 윤리의 힘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도구”임을 굳게 믿는다. 인문학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부여해주고, 그러한 시민의 욕구와 필요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민주주의가 더 좋은 민주주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도중에 배석한 대한성공회 임영인 신부가 기자에게 귀띔해줬다.

“쇼리스 씨는 원래 지난해 가을에 방한하기로 돼 있었는데 건강 문제 때문에 늦어졌어요. 사실은 이번에도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이번이 아니면 영영 와보지 못할 것 같다’고 해서 방한이 성사됐습니다. 쇼리스 씨는 지금 암 4기로 투병 중이세요.”

쇼리스 씨는 1972년 이래 미국 잡지인 ‘하퍼스 매거진’ ‘네이션’ ‘뉴욕타임스 매거진’ 등의 객원 편집자로 글을 써온 언론인이기도 하다.



주간동아 2006.01.31 521호 (p126~126)

송문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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