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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조폭, ‘기는’ 법규

연예기획·건설·금융업 진출해 합법 ‘위장’ … 현행 법으로는 지능화된 조폭 처벌 한계 ‘정비 시급’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뛰는’ 조폭, ‘기는’ 법규

‘뛰는’ 조폭, ‘기는’ 법규

한국 조폭은 현재 ‘약탈자’ 단계에서 ‘기생자’ ‘공생자’ 단계로 진화한 상태. 한국형사정책 연구원 조병인 국장은 “남은 건 문신뿐이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사업가로 변신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서울의 한 경찰서에 근무하는 박모 형사는 최근 평소 정보원으로 알고 지내는 이모 씨에게서 명함 한 장을 건네받았다. 이 씨는 전과 20범의 조직폭력배. 그는 “성인오락실에 납품되는 오락기계 제조회사를 차렸다”고 했다. 오락기계는 납품단가가 생산단가의 두 배 이상인 알짜 사업. 박 형사는 “자기 물건을 받지 않겠다는 오락실 사장이 있으면 부하들을 보내 온갖 협박을 할 게 뻔하지만, 합법적인 경제활동인 만큼 지켜볼 도리밖에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폭이 변했다”고 형사들은 입을 모은다. 짧게 깎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빼입고 떼로 몰려다니며 ‘형님’ ‘아우’ 하거나, 업소들에게 속칭 ‘보호비’를 뜯어내거나 피 튀기는 패싸움을 벌이는 조폭은 이제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혹은 삼류건달, 시골깡패이거나.

요즘 조폭들은 번듯한 명함을 가진 사업가로 변신하는 추세다. 5년 전 조폭 검거 공로로 특진한 양모 형사는 “요즘은 돈이 없으면 자기들끼리도 조폭 대접을 해주지 않을 정도로 과거와는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박 형사는 “성매매, 떼인 돈 회수, 마약 거래, 성인오락실 운영, 대포차·대포폰·대포통장 판매 등 돈 되는 사업은 무엇이든 하는 게 요즘 조폭”이라고 전했다. 그의 동료 오모 형사는 “요즘 조폭들은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한다”면서 “형님을 대신해 감방에 들어가는 조폭의 미덕(?)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부하들이 강간이나 폭행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문제가 커지기 전에 돈을 써 피해자와 합의 보는 추세”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 일대 출장마사지 사업 장악

범죄학에서는 조폭의 성장 단계를 △약탈자 △기생자 △공생자의 3단계로 설명한다. 약탈자는 폭력을 행사하며 관할구역에서 보호비를 뜯어내는 단계, 기생자는 도박·성매매·마약밀매 등 ‘검은 사업’에 뛰어드는 단계다. 공생자란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보이거나 최소한 용인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변모하는 단계로 건설업, 부동산업, 금융업 등에 뛰어든 조폭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계적으로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조폭은 약탈자에서 기생자·공생자 단계로 변신한다고 한다. 전대양 교수(관동대 경찰행정학과)는 “우리나라 조폭들은 현재 약탈자에서 기생자와 공생자로 변모한 단계”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경찰은 조폭이 서울 강남 일대의 출장마사지 사업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1992년 러시아 여성들을 활용해 시작된 출장마사지는 처음에 한 집창촌 포주 출신의 사업으로 시작됐다. 그러던 것이 2~3년 전 지방도시에서 올라온 3개의 조폭 연합체가 그를 몰아내고 출장마사지 사업권을 획득했다는 것. 강동경찰서 조폭전담팀의 한 형사는 “현재 5개 업체가 성업 중인데 업소당 월 매출액이 1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엄청난 이권 사업”이라고 전했다.

한국 조직폭력 실태에 관한 책을 펴낸 안흥진 경위(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이미 상당수 조폭들은 연예기획사, 건설업, 부동산업, 금융업 등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제2금융권 회사를 차리고 서민들에게서 받은 예금을 갖고 해외로 도주하거나, 부동산 중개업소를 차려놓고 급매물이나 전매이권 등에 개입하거나 건설 관련 이권을 독점한다는 것. 안 경위는 “이용호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등 때도 몇몇 조폭 이름이 거론됐듯이 이제는 조폭이 주가조작과 기업 인수합병에까지도 손을 뻗친 단계”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때문에 과거에는 소수가 조폭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요즘은 기업 종사자나 주식 투자자 등 다수의 직·간접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뛰는’ 조폭, ‘기는’ 법규

90년대 초 대검찰청이 만든 전국 조폭 계보도. 현재는 많이 와해됐다.

조양은, 김태촌 등 거물급 조폭 수괴가 연이어 검거되던 90년대 초반 조폭을 잡는 가장 무서운 도구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처법) 제4조 1항이었다. 이는 조폭을 만들거나 가입한 사람을 엄벌하는 법조항으로 수괴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간부는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형사들은 “폭처법 4조 1항은 실효성을 잃은 지 오래”라고 입을 모은다. 2004년 경찰이 검거한 조폭은 모두 3203명. 이중 경찰은 절반에 못 미치는 1458명을 4조 1항을 적용해 검찰로 송치했다. 이 중에도 실제로 4조 1항으로 처벌받은 조폭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판례에 따르면 폭처법 4조 1항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두목·행동대장·조직원 간의 엄격한 규율이 존재하는 통솔체계 △폭력을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 △경제적 이익 추구 등의 요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폭력성이나 이익 추구는 쉽게 증명되지만 통솔체계는 증명하기 어렵다. 노태우 정권 시절 ‘범죄와의 전쟁’ 때 조직체계가 많이 와해된 조폭들은 처벌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문서화된 행동강령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기 때문.

‘행동강령’ 안 만들면 조폭으로 처벌 힘들어

지난해 10월 서울 강남경찰서는 보험사기(일부러 교통사고를 내고 보험회사에 과다한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요구)를 일삼고 유흥가를 대상으로 청부폭력을 자행한 ‘전국연합파’ 조직원 150여명을 잡아들였다. 하지만 강남서는 이들에 대해 4조 1항 적용을 포기해야 했다. 문서화된 조직체계나 행동강령 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 정선기 형사과장은 “과거 4조 1항으로 처벌된 적 있는 15명은 조폭이 확실하지만, 나머지 조직원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이며, 보험사기를 한 건 맞지만 조폭은 아니다’고 주장해 개별법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뛰는’ 조폭, ‘기는’ 법규

경찰은 서울 강남 일대의 출장마사지 사업은 조폭이 장악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조직성 자체가 많이 약화됐다. 수사기관에 노출되기 쉬워 다른 조폭과 여간해서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한 명의 두목이 5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다니던 대규모 체제에서 유흥업소, 성인오락실, 건설회사 등 각각의 사업체에 5~10명씩 나누어 배치하는 ‘슬림화’ 경향도 뚜렷하다.

심지어 ‘신디케이트형’ 조폭 형성도 활발하다. 한 가지 프로젝트가 계획되면 여러 조직들이 행동대원을 몇 명씩 차출해 파견하고 일이 끝나면 곧장 해체하는 것.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부도 난 기업을 협박과 폭력을 사용해 인수해온 조폭을 수사한 한 형사는 “다 잡아들여놓고 보니 기업을 찾아가 갖은 협박을 하던 이들은 모두 10개 조직에서 5~6명씩 파견된 조직원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경찰 내부에서는 “조폭 잡기 위한 법안을 재정비해달라”는 목소리가 높다. 폭처법 4조 1항은 조폭을 구성하거나 가입하는 경우만을 적시하는 탓에 이 법조항으로 한번 처벌된 자가 출소 후 계속 조폭으로 활동해도 재차 처벌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법무부는 현재 조폭으로 계속 활동하는 경우에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개정안의 국회 제출을 앞두고 있다. 안 경위는 “겉으로는 합법적으로 보이지만 은밀하게 범죄행각을 벌이는 조폭 내부에 진입하기 위한 함정수사를 허용하고, 제보자 신원을 확실하게 보호하는 증인보호 프로그램 등의 내용을 담은 종합범죄법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형사정책연구원 조병인 국장은 “특별법에 의한 가중처벌은 조폭 일망타진에 한계가 있다”면서 “돈세탁 방지법, 불법마약류 통제에 관한 법 등 불법행위로 벌어들인 돈을 강력하게 몰수하는 방법으로 조폭 자금의 씨를 말리는 것이 조폭 수사의 국제적 추세”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6.01.31 521호 (p74~75)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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