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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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함께 청산에 살어리랏다

기득권 세력 견제 속 42살에 입산 … 중국 관리 시절 차 살림 익혀 본국에 차 보내기도

  • 정찬주/ 소설가

    입력2004-11-04 1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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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와 함께 청산에 살어리랏다

    단풍이 시작되고 있는 가야산 홍류동과 농산정.

    해인사 초입의 계곡 가에서 흐르는 물을 내려다본다. 푸른 낙락장송 사이로 노랗고 붉은 낙엽이 물 위에 점점이 떠 흐르고 있다. 계곡 이름 그대로 홍류동(紅流洞)이다. 건너편 정자 앞 계곡 가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 둔세지(孤雲崔致遠先生遁世地)’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서 있다. 외로운 구름처럼 떠돌다 간 최치원이 은둔한 땅이라는 뜻이다. 정자 이름은 농산정(籠山亭). ‘농산’은 고운이 가야산 홍류동을 읊조린 시 구절에서 빌린 말이다.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사람 말은 지척에도 분간키 어려워라/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 둘러치게 했나(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고운이 가야산을 첫 은둔지로 택한 것은 해인사에 그의 친형인 현준(賢俊) 스님과 친교가 두터웠던 화엄 종장(宗匠·경학에 밝은 사람) 희랑(希朗)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운은 신라 헌안왕 1년(857)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6두품인 견일(肩逸). 12살(868년)에 당나라로 유학 가 6년 만인 17살 때 과거에 급제한다. 20살에 표수현위에 임관되지만 1년 만에 “덩굴풀처럼 누구에게 붙어 사느니, 거미가 줄을 치듯 제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한다. 수없이 생각해봐도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며 현위를 사임한다. 그러나 녹봉은 곧 바닥이 났고, 설상가상으로 황소(黃巢)의 반란군이 밀어닥쳐 생계가 아닌 생사를 걱정하기에 이른다. 이때 문사 고병(高騈)이 회남(淮南) 절도사로 부임하자 지인의 도움으로 관역(館驛) 순관에 기용된다. 이후 고운은 고병의 신임으로 중요 직책을 맡는다. 서거정이 우리나라 시문집의 비조라고 찬양했던 ‘계원필경’ 20권의 글도 이 무렵에 써둔 것이다.

    차밭 드넓은 화개동에서 신선 같은 생활



    고운의 차 살림은 중견 관리로서 공·사석의 많은 행사에 불려다닌 이 시기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계원필경’의 ‘사탐청요전장(謝探請料錢狀)’에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다 하니 이 편에 차와 약을 부쳤으면 합니다’ 하고 병든 부모에게 차와 약을 보내는 문장이 보인다.

    고운은 당의 혼란과 부모의 병환 때문에 28살(884년) 때 귀국길에 오른다. 헌강왕의 환대를 받았지만 벼슬은 경서를 강의하는 시독(侍讀), 문필기관의 부책임자인 지서서감(知瑞書監), 유학한 학자에게 주어지는 한림학사, 병부에 자문하는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을 지냈다. 그런데 헌강왕에 이어 왕의 동생 정강왕마저 1년 만에 죽자, 고운은 진골들의 견제를 받아 지방 태수로 전전한다. 미소년을 불러들여 요직에 앉히는 등 진성여왕의 난정으로 반란이 자주 일어나 신라는 급격히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궁예와 견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에 고운은 진성여왕에게 구국책의 일환으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직언하지만, 여왕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진골 귀족들에게 묵살당하고 만다.

    마침내 고운은 42살 때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입산한다. 지리산 청학동과 삼신동, 고운동계곡, 천왕봉 아래 법계사, 차밭이 드넓은 화개동에서도 차를 마시며 신선처럼 살았다. 그가 화개동에서도 살았다는 증거는 ‘지봉유설’에 소개되고 있는 고운의 시 ‘화개동시(花開洞詩)’다.

    나그네는 농산정에서 나와 고운과 희랑 스님이 차를 마시며 세상을 논했던 학사대로 가본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각 옆 학사대는 터만 남아 있고, 전나무 한 그루가 못다 펼친 고운의 꿈인 양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을 뿐이다.

    가는 길

    88고속도로에서 해인사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해인사 가는 길로 가다보면 국립공원매표소가 나오고 조금 지나면 홍류동 계곡 가에 농산정이 나타난다.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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