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4

2004.09.30

신명 나게 장구 치시던 그 모습 지금도 막 보고 싶어요

  • 구술 정리·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9-23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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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 나게 장구 치시던 그 모습 지금도 막 보고 싶어요
    자식 마음 다 똑같겄지만 지는 아부지를 참 사랑혔어요. 사랑허고 존경허고, 지금도 막 보고 싶어요.

    지가 충남도민이거던요.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 아부지는 가축 장사를 허셨는데, 뭐 볼 것 없는 직업이지만 우리 7남매헌테는 둘도 없는 분이셨어요. 맏아들인 저를 무척 이뻐하셨거든요.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면서 어디든 인사를 시키셨어요. 덕분에 어른 뫼시는 법, 초상 치르고 밥 먹는 예절 같은 것들은 확실허니 익힐 수 있었지요.

    아부지는 농악을 치셨어요. 광천 쪽에서는 우리 동네 농악대가 젤로셌어요. 아부지는 장구잽이였는데 저는 그게 되게 자랑스러웠어요. 어머니도 신명 있는 분이라 지가 나중에 아주 풍류길로 나선다 했을 때도 두 분 다 “잘 되았다” 박수 쳐주셨지요. 자식이 잘 노는 게 그냥 보기 좋았던 겨.

    중학 마치고 고향을 떴어요. 은행원 되겠다고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했지요. 그리고 이때껏 40년을 서울서만 살았어요. 인생살이 간난신고, 입에 풀칠하기 힘든 때도 있었지만 추석 설 명절 때는 꼭꼭 고향을 찾았어요. 서울역에서 밤새 줄 서 겨우 야간 완행표를 사고, 동서울터미널에서 낡은 버스에 짐짝처럼 실려가면서도 그저 고향 가까워지는 것이 고맙고 즐거웠지요. 아부지는 또 참 재미가 있으셔 금방 왔다, 쉽게 왔다 하면 외려 싱겁다 하셨어요. 한 10시간 걸렸다, 아주 죽을 고생을 했다 해야 푸짐허다고 생각하시지.

    신명 나게 장구 치시던 그 모습 지금도 막 보고 싶어요

    아들의 노래를 세상 최고의 명연주인 양 집중해 듣고 계신 부모님.

    85년도부터 한 5년간은 추석 때마다 작은 마을 잔치를 열었어요. 별거는 아니고, 내 돈 동생 돈 해서 한 20만원이 마련되면 선물을 사는 거예요. 공책, 연필, 빨랫비누, 플라스틱 바가지…. 낮에는 공회당 마당에 모래를 두 리어카쯤 쏟아놓고 애들 씨름을 시켜요. 저녁참이 되면 본격적으로 노래자랑을 시작하지요. “아부지, 장구 좀 치셔요. 지가 쇄납(태평소) 불 테니께.” 그러구서 밤늦도록 신명 나게 노는 거예요. 우리 아부지랑 이장님이 떡하니 심사위원을 맡고, 하하. 허니 그 어른덜이 뭘 아시겄어요. 그래도 참 재미가 있잖여요. 하늘에는 두리둥실 둥근 달이 떠오르고…. 동네 애들헌테 고향에서의 추억 한 자락씩 챙겨주고 싶었어요. 살기 힘들 때, 눈물 날 때, 죽고 싶을 때 힘 얻으라고. 꼭 지만큼만요.



    98년 아부지가 돌아가셨어요. 지는 그때 2집 녹음을 하고 있었거든요. 머릿곡 제목이 ‘기침’이었는디, 아, 아버님 병명이 폐암인 거예요.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 찾아오는/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삶은 언제나 가시 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아무리 다짐을 놓고 놓아도…’ 그렇게 우리 아부지가 먼 길 가시는데, 앞이 깜깜하고 하늘이 무너지더라고.

    3년 전에는 어무니도 돌아가셨어요. 추석 때 고향 집에 갔는데 늘 한결같던 음식 맛이 암만 해도 이상한 거여. 병원 가니 하는 말이 췌장암이라고….

    아부지 돌아가시고 첫 추석 때 고향 역전에서 울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 받쳐놓고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이젠 거기 없는 거여. 엄마, 아부지 없는 고향은 고향이라도 고향이 아니구나. 한 세상이 다 지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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