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4

..

산처럼 무겁고 성실한 농부의 삶 ‘성실’이라는 재산 물려받아

  • 구술 정리·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4-09-23 16: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산처럼 무겁고 성실한 농부의 삶 ‘성실’이라는 재산 물려받아
    내 고향은 경남 창녕이다. 20여년 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로는 고향을 찾을 근거가 사라졌지만 정겹던 시골 정경만큼은 눈에 선하다. 이를테면 명절 때 어머니와 누나들은 떡과 부침개를 만들고,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누는 풍경들 말이다.

    나는 7형제 가운데 여섯 번째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마흔을 넘기신 아버지는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경상도 특유의 사나이였다. 당신의 여동생이 오랜만에 집에 찾아와도 기침 몇 번으로 반가움을 표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분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리곤 했다.

    한마디로 타고난 농민이었기에 그만큼 근면, 성실하셨다. 나는 아침잠에서 깼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잠자리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밤에는 새끼를 꼬며 자식들이 잠들길 기다리셨고, 아침에는 누구보다 먼저 들녘에 나가시거나 마당에서 쇠죽을 끓이셨다. 성실한 아버지 밑에 게으른 자식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그 어떤 것보다 큰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달빛 좋은 한가위 날에도 밤새 볏단을 모으셨다. 이맘때는 추어탕이 별미였는데, 논의 물을 흘려보내는 날 새벽 4시쯤 추어를 거두는 일은 항상 아버지의 몫이었다. 지금도 세숫대야 하나 가득 추어가 팔딱거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극복 대상이었냐고? 그것은 잘 모르겠고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 때 왕복 30리 길을 걸어 통학했는데,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 앞 언덕길로 들어서니 저 멀리 들판에서 아버지가 볏단을 얹고 계시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저렇게 열심히 일하시는데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언젠가 둑이 무너져 논이 물에 잠겼을 때도 아버지는 벼 한 포기라도 더 세우려고 물속을 헤집고 다니셨다. 거의 하루 종일 그 작업을 반복하셨는데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지셨다. 다행히 옆에 있던 내가 부축해드려서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봤고, 내가 도움을 드렸다는 생각에 한동안 우쭐해했다.

    아버지는 산처럼 크고 무거운 분이었다. 대학 때 시국이 어수선해 서울대를 제적당할 때도 딱히 뭐라고 질책하지 않았다. 서울 남부경찰서에서 한 달간 구금된 뒤 구치소로 송치될 때였는데, 당시는 장발이 유행했고 한 달간의 구금생활을 마치니 친구들은 ‘예수’ 같다며 위로했지만 사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호송버스 앞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대면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가훈은 없었지만(사실 아버지의 삶이 가훈이나 다름없다), 평소에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해방 직전까지 보국대(報國隊)에 끌려가 7년간 고생하셨는데, 보국대에서일본인이 갖고 있는 좋은 모습을 배우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인 듯싶다.

    자식을 온전히 신뢰했기에, 내가 만원이 필요하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10만원을 보내주시던 분. 그분의 삶은 바위와 같이 단단했기에 지금의 나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잇따라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호강 한번 못 시켜드린 셈이다. 부모님을 떠올리니 함께 추억을 만들어내지 못한 내 두 자식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 역시 추석이 다가오니 아버지가 그립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