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4

2004.09.30

“우리가 바로 옛길 길라잡이”

잊혀진 옛길 직접 걸으며 탐사·연구에 정열 쏟는 사람들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9-23 10: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길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효용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것이 길의 운명이다.
    • 그런데 이 순리를 거스르는 이들이 있다. 옛길을 걷는 사람들. 그들은 이미 사라진 길을 되살려
    •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이들이다. 이제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폐도 위에서,
    • 아스팔트로 덧씌워진 100여년 전의 대로변에서 그들은 감춰진 역사를 읽고, 삶을 곱씹는다.
    • 맨몸으로 이 땅의 역사와 마주하는 이들,
    • 우리 땅에서 만난 건강한 옛길지기 다섯 명을 소개한다.
    “우리가 바로 옛길 길라잡이”
    자유촌 김재홍·송연 부부

    2년간 도보 여행 … 온 가족 옛길 사랑

    김재홍씨(47)의 별명은 ‘자유촌장’이다. 그의 부인 송연씨(36)는 ‘자유부인’으로 통한다. 옛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촌장’과 ‘자유부인’의 명성은 남극 대륙을 처음 횡단한 아문센의 그것에 비견될 만큼 높고 찬란하다. 이들은 옛길에 ‘미침’으로써 우리나라 옛길 탐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길이 좋아도 생업을 접고 초등학생 딸까지 함께 걸리며 전국을 누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그것을 해냈다. 2000년 여름 부부는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비를 줄이기 위해 야영 장비와 음식 준비 도구까지 챙겨 배낭을 짊어진 채 길로 나섰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있던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통영별로, 경흥대로 등 이 땅 구석구석의 옛길이 이 가족의 발 아래서 새롭게 깨어났다.

    이들이 처음 걷기 시작한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옛길 연구는 척박한 수준이었다. 참고할 만한 지도는 없었고, 옛길 곳곳은 이미 폐도로 변해 있었다. 지리학이나 역사학에 문외한이던 이들은 옛길을 걷기 위해 스스로 연구까지 해내야 했다. 고지도와 역사책을 뒤져가며 대동여지도를 한글로 옮겼고, 마을사람들의 고증을 받아가며 사라진 길을 하나씩 복원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어낸 이 자료들이 아까울 법도 한데, 이들은 제 발로 만들어낸 생생한 우리 길 답사기를 인터넷 사이트(자유촌, www. jayuchon.com)에 올려 후배 순례자들에게 방향까지 제시해주고 있다. 훌륭한 스승으로서, 또 믿음직한 선배로서, 옛길을 걷는 이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지닌 셈이다.

    2년여에 걸친 도보 여행을 결국 ‘경제적 이유’ 때문에 접은 이들은 요즘 의정부역 근처에서 ‘옛길 따라’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이 가게 앞에 뻗어 있는 한 줄기 길은 ‘경흥대로’로, 조선시대 한양에서 러시아 접경지대까지를 잇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옛길의 일부다. 이 길 옆에 가게를 얻기 위해 카페로는 최악의 입지 조건인 건물 3층이라는 핸디캡까지 무릅썼다고 하니, 정말 지독한 옛길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동여지도가 눈길을 붙들고, 그외에도 곳곳에 지도와 사진들이 펼쳐져 있다. 가게 안이 온통 옛길 답사의 흔적들이다. 우리 길을 걷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이 카페를 열었기 때문이란다.

    “처음에는 인도 배낭여행을 가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려면 체력이 우선이겠다 싶어서 동해안을 걸으며 야영을 해보기로 했죠. 정동진에서부터 철책선을 따라 걸어가는데, 웬걸 우리 땅이 너무 매력적인 겁니다. 그렇게 울산, 포항까지 걸었어요. 그후 도보 여행의 멋에 흠뻑 빠져서 인도는 제쳐두고 우리 땅만 걷게 됐죠.”

    김씨는 첫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후 어느 길을 걸을까 고민하다 우연히 영남일보에 실린 ‘영남대로 일천리’를 보게 됐다고 한다. 1997년 영남일보 기자들이 ‘대동여지도’를 교본 삼아 한양에서 동래까지 뻗은 우리 옛길을 탐사, 복원한 내용을 담은 기획기사였다.

    “그때부터 ‘우리 옛길’을 화두로 삼게 됐어요. 아내에게 ‘뭘 한들 못 벌어먹고 살겠냐’며 함께 떠나자고 했죠. 처음에는 꺼려하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저보다 더 잘 걷고, 지도도 잘 찾아서 서로에게 큰 힘이 됐어요.”

    이들 부부는 우리 길을 걸으며 ‘지금껏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왔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일단 길을 떠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고, 부부 사이에는 같은 길을 걷는 ‘동지적 애정’이 싹텄다.

    이들은 또 한 번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만큼의 돈만 모이면, 미련 없이 카페를 접고 길을 찾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옛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리 땅을 걷는 이들이 거의 없었어요. 내가 걷는 길이 그대로 역사가 된다는 부담감이 컸지요. 하지만 이제는 많은 후배, 동료들이 생겨서 마음 든든합니다. 그들과 함께 평생 우리 길과 역사를 되찾으며 살고 싶어요.”

    “우리가 바로 옛길 길라잡이”
    국토장정기마대 오승훈 서울대 단장

    곤지암서 부산까지 … 말 타고 426km 순례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말을 타고 지나던 옛길을 다시 걸을 수 있을까. 똑같이 말을 타고! 사극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 매력적인 프로젝트를 젊은 대학생들이 현실로 만들어냈다. 서울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함께 꾸린 ‘국토장정기마대’ 단원 9명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올 여름 대동여지도를 교과서 삼아 곤지암에서부터 부산까지 뻗은 옛길 426.5km를 ‘말을 타고’ 걸었다.

    “당시의 역참지들은 이미 다 도시가 되거나 사라져버렸어요. 말이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죠. 하지만 직접 마사를 짓고, 그 곁에서 야영하며 우리 길을 걸은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국토장정기마대’ 서울대 단장을 맡은 자연과학부 3학년 오승훈군(22)은 건강하게 그을은 갈색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오군이 ‘기마 국토 장정’을 준비한 건 올 4월부터. 곤지암에서 마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명기 한국스카우트 북부지역 특수대 승마대장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대동여지도에 나온 전국의 주요 말길은 5개예요. 이 가운데 남쪽에 남아 있는 건 서울에서 목포를 잇는 말길과 서울에서 정동진을 잇는 말길, 그리고 이번에 제가 걸은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말길 3개죠. 김단장님이 2002년부터 대학생들과 함께 우리 옛길을 종주해오셨기 때문에 이번 길이 남쪽에 남은 마지막 말길이라고 하더군요.”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말길을 직접 말을 달려 답사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오군은 직접 단원을 모으고 서울대 승마단을 꾸렸다. 하지만 기마 대장정은 결코 이름처럼 낭만적이지만 않았다. 단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승마를 배우기 위해 ‘바닥부터’ 모든 것을 해야 했다.

    “승마를 귀족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무술 도장의 수련생처럼 승마를 배웠어요. 처음에는 하루 종일 말똥 치우고 톱밥 까는 일만 했죠. 모든 식사와 설거지는 당번을 맡아 돌아가며 했고요. 하루에 말을 탄 시간은 한 2시간 정도 됐을까, 나머지는 모두 ‘잡일’이었어요. 나중에 보니 그게 다 말과 친해지게 하고, 야영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한 훈련 과정이었더라고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럭셔리 보이’ 럭셔리 걸’들은 다 떠나버렸어요.”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곱게 자란’ 젊은이들에게 고된 ‘수련’이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덕에 8월17일 함께 국토 장정을 떠난 9명의 단원들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무적의 용사들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말과 함께 우리 길 위에 섰을 때 이들은 옛길에 쌓인 역사가 몸으로 전해져오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이번에 걸은 길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본진이 서울로 진격하던 길. 조선군과 왜군의 한 판 격전이 벌어졌던 충주를 지나며 오군은 자신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그리고 종주를 준비하며 지식으로 배웠던 것과 전혀 다른 ‘생생한 느낌’이었다.

    “말을 타고 길을 걸으면 말의 속도를 따라 움직이는 몸이 자연스럽고 편안해져요. 차를 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명의 느낌이 들죠. 밀양을 지나며 논밭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 일, 촉촉한 안개비가 내리던 날 문경새재를 넘었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군의 다음 목표는 아직 가보지 못한 북쪽의 말길을 기마 종단하는 것. 자신이 직접 할 수 없다면 후배들에게라도 길을 열어주기 위해 통일부 등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우리가 바로 옛길 길라잡이”
    일본인 조선 지리학자 도도로키 히로시

    영남대로 일천리 걸으며 우리 옛길 복원

    옛길을 걷는 사람들이 가장 분통을 터뜨리는 대상은 ‘일제’다. 일제는 우리 땅을 ‘멋대로’ 점유했고, 풍수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 옛길을 망가뜨렸으며, 수천년 이어져 내려온 고유한 지명들을 ‘멋대로’ 바꿔버렸다. 일제 때문에 우리 옛길 가운데 상당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폐도가 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여기 한 일본인이 있다. 조선의 옛길을 찾아 걸으며 잊혀진 지명과 역사를 하나씩 되살리는 이, 일본인 조선 지리학자 도도로키 히로시씨(34)다.

    일본 중세의 고도 가마쿠라가 고향인 도도로키씨는 어릴 때부터 지도와 기차를 좋아해 고등학교 때 이미 일본 전국의 철도 2만km에 모두 승차했다고 한다. 그는 지리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90년대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옛길 복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옛길을 자주 걸었다.

    1998년 서울대 대학원 지리학과로 유학 온 그가 조선의 옛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우연히 영남일보의 ‘영남대로 일천리’를 보곤 무릎을 쳤다고 한다. ‘그래, 조선의 옛길도 걸어보리라.’

    그래서 그의 옛길 답사는 99년 영남대로를 종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도도로키씨는 그 해 1월부터 6개월 동안 매 주말마다 지난주에 마친 지점을 찾아가 다시 걷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서울 남대문에서 부산 동래까지 ‘영남대로 일천리’를 따라 걸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조선도, 고려대 최영준 교수의 ‘영남대로’와 각 마을의 옛 지도까지 총동원한 여정이었지만, 길 찾기는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분명히 있어야 하는 길이 사라지고 갑자기 다른 지명이 등장하는 등 ‘일제’의 흔적이 우리 길 깊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1960, 70년대 무리하게 진행된 ‘국토 개발’도 옛길 망가뜨리기에 한몫을 했다.

    도도로키씨는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는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다. 답사 과정에서 만난 한국인과 결혼했을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춘 그에게 노인들은 기꺼이 마음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하긴 한국 사람도 잘 모르는 ‘구렁목(V자 모양으로 파인 계곡)’ 같은 단어를 찾아 쓰며 잊혀진 우리 길을 복원하고 있는 그에게 누가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도도로키씨는 내친김에 삼남대로와 관동대로도 마저 걸었고, 그때의 결과물을 모아 ‘영남대로 답사기’와 ‘삼남대로 답사기’라는 책도 냈다. 지금은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객원교수로 ‘경상도의 읍성과 읍지 복원’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왜 일본인이 우리 길을 걷느냐며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조선의 옛길을 걸으며 곳곳에 살아 숨쉬는 풍수와 역사의 매력에 흠뻑 빠졌습니다. 지금껏 남아 있는 아름다운 길들이 개발 때문에 속속 사라지는 걸 생각하면 진심으로 속상하고요.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옛길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더 늦기 전에 조선의 옛길을 살려낸다면 그것이 정말 의미 있는 일 아닐까요.”

    도도로키씨의 이런 마음은 그의 책 곳곳에도 살아 숨쉰다.‘영남대로 답사기’의 한 구절이다.

    “마을 서쪽에는 갈색 돌로 쌓은 성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다는 고모산성이다. … (이 성은) 특별히 정비하지는 않은 채 황폐화되고 있는 상태다. 성곽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되어 있고 … 한마디로 소멸의 위기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짓거나 각지에 거북선 복제를 전시하는 것도 좋지만, 복제를 만들 돈이 있으면 귀중한 실물 유적을 제대로 유지하는 게 급선무다.”

    길을 걷다 지칠 때면 막걸리를 마시며 힘을 얻고, 1년 6개월 된 아들 준이를 한국에서 키우고 있는 도도로키씨의 다음 목표는 ‘대동지지’에 기록된 9대로를 모두 걸어 책을 펴내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옛길 길라잡이”
    인문지리학자 신정일

    길 따라 강 따라 … 옛길 연구에 한평생

    많은 사람들은 그를 향토사학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에게 정말 어울리는 이름은 따로 있다. ‘인문지리학자’. 신정일씨(50)는 250년 넘게 끊어진 우리나라 인문지리학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이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에서 ‘황토현문화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며 고집스레 역사와 지리에 천착하는 그에게 세상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변변한 학벌도 없는 그가 전국을 답사하며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것을 보고 ‘향토사학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향토사’의 범주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 전반을 연구했고, 마침내 올해 쓴 ‘다시 쓰는 택리지’(휴머니스트 펴냄)를 통해 지난 세월 자신의 연구와 노력을 묵묵히 웅변했다.

    ‘택리지’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20여년간 전국을 유랑한 끝에 1757년 펴낸 인문지리학서. 신씨는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쓴 이번 ‘택리지’에서 250여년의 세월을 밟으며 이중환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한 손에는 택리지를, 다른 한 손에는 대동여지도를 들고’ 20여년간 전국을 답사했다는 그의 삶의 편력은 이 책 곳곳에서 화려하게 꽃피어 있다.

    그의 영남대로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그는 옛길을 걸으며 그 안에 담긴 역사까지 함께 되새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영남대로는 세 갈래로 나 있었다고 한다. 열나흘 길, 보름 길, 열엿새 길이다. 열나흘 길은 청도와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는 가장 빠른 길. 보름 길은 울산에서 의성~풍기~죽령을 넘어 단양에서 남한강 상류의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이었고, 열엿새 길은 김해~성주를 거쳐 추풍령을 넘어가는 도로였다. 과거 보는 선비들은 죽령은 ‘쭉 미끄러진다’ 하여,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피했다고 한다. 이들이 가장 선호한 길은 ‘경사스러운(慶) 일을 듣는다(聞)’는 문경(聞慶)새재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렇게 우리 땅 곳곳에서 옛이야기가 피어오른다. 옛길 답사는 구성진 우리 전설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큼이나 신나고 뜻있는 경험이 된다. 그가 옛길만 다시 걸은 것은 아니다. 그는 전국의 산 300여곳을 오르내렸고, 한강 514km, 낙동강 517km, 금강 401km, 섬진강 212km, 영산강 138km, 만경강 98km, 동진강 54km도 모두 따라 걸었다. 연구 자료를 만들기 위해 카메라 두 대와 각종 참고 서적을 담은 15kg짜리 배낭까지 짊어진 채였다.

    올 가을 아직 채 걷지 못한 삼남대로를 향해 길을 떠날 신씨는 우리 길을 찾으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글학회가 펴낸 ‘한국지명총람’을 먼저 읽어보라고 권했다. 일본이 지명과 길을 다 바꾸어 버리기 전 우리 땅의 옛 지명과 옛 지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를 가든 그 책에 담긴 지명을 이야기하면 토박이들은 ‘우리도 잊고 있던 이름을 기억한다’며 반가워한다고 한다.

    신씨가 길을 걸으며 항상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 ‘강을 보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 근원인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가’라는 니체의 금언. 그는 자신의 행로가 잊혀진 근원을 찾아가는 길임을 떠올릴 때마다 힘이 샘솟는다고 털어놓았다. 10월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우리 땅 걷기 운동 모임’을 발족시키는 신씨는 남은 생도 근원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데 바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생 안에 북쪽을 답사해 명실상부한 택리지를 다시 쓸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