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사람과 삶

“광개토대왕비, 고양시에 옮겨왔어요”

임순형, 진본과 똑같이 모사품제작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광개토대왕비, 고양시에 옮겨왔어요”

“광개토대왕비, 고양시에 옮겨왔어요”
서울에서 통일로를 타고 달리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흥도동 고갯마루에 이르면 거대한 비석 하나가 운전자의 눈길을 잡아당긴다.

사람 키의 서너 배에 이르는 위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외양…. 가까이 다가갈수록 육감은 어느새 “아!” 하는 탄성으로 바뀐다. 비석의 재질과 크기, 새겨진 글씨, 마모되고 훼손된 모양까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이하 대왕비)와 너무도 똑같다. 비록 모사품이라고는 하지만 진본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으려 애쓴 노력이 역력하다. 높이 6.4m, 무게 47t의 비석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온몸으로 드러내보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상(感傷)에 빠지게 한다. 고구려사 왜곡을 불러온 중국의 동북공정, 우리 정부의 뒷북 대응, 구겨진 민족의 자긍심 등등. 생각은 어느덧 이 모든 것을 지나쳐, 비석이 어떻게 이곳에 서 있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다다른다.

한 음식점의 너른 마당에 세워진 이 비석은 한 한국인의 의지 끝에 중국 허베이성(河北省)에서 어렵사리 구한 한 덩어리의 오석(烏石·검은 돌)에 중국의 석공 명인의 기술이 합쳐져 광개토대왕비 진본과 똑같이 만들어진 것. 육중한 비석을 옮기기 위해 중국에서 인천항까지는 특수 화물선이, 인천항에서 이곳까지는 초대형 트레일러가 동원됐다. 드러누운 비석을 똑바로 세워놓기 위해선 국내 최대의 150t짜리 이동형 크레인을 이곳까지 공수해와야 했다. 1999년 4월 2000km 떨어진 중국에서 비석을 제작하기 시작해서 2004년 6월 이곳에 세워지기까지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비석이 깨지거나, 석공의 실수로 제작이 중단되기를 다섯 차례.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47t의 검은 돌은 광개토대왕의 영기(靈氣)를 받은 비석으로 우뚝 섰다.

중국서 돌 구하고 제작하고 국내 들여오는 데 5년 걸려

이 비석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끓어오르는 궁금증은, 역시 엄청난 ‘대역사’를 이뤄낸 장본인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것.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일까. 아니면 비석 수집가, 금석학자? 하지만 5년 동안 중국을 들락거리며 대왕비의 복원을 이뤄낸 주인공은 그 모두도 아닌 평범한 식당 주인 임순형씨(49)였다.



임씨가 중국 관광길에 나섰다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대왕비를 마주친 시점은 99년 4월. 만주지역을 관광하다 우연히 비석을 본 임씨는 감전된 듯 그 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대왕비를 처음 봤을 때 느낀 전율은 곧 비석을 우리나라로 옮겨와야겠다는 숙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비석의 웅대함에서 고구려인의 힘과 기상을 느낀 순간, 우리가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영광을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훔쳐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대왕비와 똑같은 비석을 만들어가지고 오기로 작정했죠.”

임씨는 주저 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문제가 생겼다. 대왕비가 있는 지안시 근처엔 같은 재질의 검은 돌은 없고 붉은 돌만 있었던 것. 그가 대왕비와 같은 초대형 검은 돌을 구한 데는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허베이성이었다. 하지만 처음 구한 돌은 너무 작았고, 다음에 구한 돌은 석공의 실수로 그만 깨져버렸다. 그렇게 중국을 왔다갔다하기를 세 차례, 2002년 드디어 임씨는 대왕비에 쓸 제대로 된 검은 돌을 찾았다.

“결국 1500년 전 고구려는 지린성뿐 아니라 허베이성까지 자신의 영토로 두고 맹위를 떨쳤음이 증명된 셈이지요.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비석을 만든 장수왕은 수도가 있던 국내성 인근(현재의 지안시)에 비석으로 쓸 만한 돌이 없자 수십t 되는 검은 돌을 허베이성에서 수백km 떨어진 이곳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고구려인의 힘과 기상에 매료 … 그 정신 후손들이 배웠으면”

마침내 검은 돌을 찾아 비석을 만들려고 하는데, 대왕비의 사진과 모형 조각을 받아 든 석공이 자꾸 실수를 했다. 이것이 같으면 저것이 틀리는 식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임씨는 석공과 그의 가족, 제자들을 이끌고 직접 베이징에서 지안까지 1600km를 자동차로 달려갔다. 석공이 직접 대왕비를 보지 않고서는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결론 지었기 때문이다. 기름만 넣고 쉼 없이 달렸는데도 꼬박 23시간이 걸렸고, 돌아오는 길에는 차가 전복돼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스케치와 탁본까지 마친 석공은 진정한 ‘제2의 대왕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비, 고양시에 옮겨왔어요”

지난 25년 동안 전통민속품을 모아 오기도 한 임순형씨.

이렇게 해서 대왕비의 모사품이 완성된 시점이 2004년 4월. 특수 화물선과 대형 트레일러를 간신히 구해 비석을 자신의 집이자 사업장인 음식점 앞 너른 마당까지 옮겨놓았지만, 이번엔 비석을 세울 만한 대형 크레인이 없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임씨는 죄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대왕비가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갑자기 우리 민족이 누워 있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왕이 꿈에 나타나 ‘내가 너희들을 도와주겠다’며 호탕하게 웃고는 사라졌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다음날 크레인을 구했고, 드디어 대왕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6월12일 제2의 대왕비가 우뚝 선 그날, 임씨는 감격한 나머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5년간 그에게 광개토대왕은 꿈이자 희망이며, 영웅이었던 까닭이다. 실제 그는 입버릇처럼 “광개토대왕은 우리 민족의 알렉산더 대왕이자 칭기즈칸”이라고 말한다.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시퍼렇게 살아 있는 역사적 실체이자 진실로서의 영웅.

그래서일까? 그는 대왕비 제작의 취지가 담긴 머릿돌을 중국에 빼앗긴 것이 못내 아쉽다. 머릿돌에는 광개토대왕이 꿈꿨던, 또 앞으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민족의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끓는 피는 반도에 머물 수 없다!”

임씨는 올 가을, 대왕비 앞에서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인의 한을 풀어줄 ‘살풀이 굿’을 준비하고 있다.



주간동아 452호 (p62~63)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324

제 1324호

2022.01.21

‘30%대 박스권’ 이재명, 당선 안정권 가능할까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