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의 신형 쏘나타.
쏘나타의 성공 비결은 한마디로 ‘시장을 리드하는 상품성과 브랜드 파워의 조화’로 요약할 수 있다. 쏘나타 시리즈는 매번 새로운 기술과 컨셉트로 소비자 요구를 한 발 앞서 반영했다. 뛰어난 제품 경쟁력은 브랜드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쌓인 브랜드 파워가 끊임없는 제품 혁신과 맞물려 상승 효과를 내면서 쏘나타를 성공 신화로 이끌었다는 게 현대차 안팎의 평이다.
현대가 ‘SONATA’란 차명을 처음 쓴 건 1985년 10월. 스텔라 차체에 2000cc급 엔진과 크루즈 컨트롤, 파워시트 등 첨단장비를 적용해 출시한 ‘소나타’다. 현대는 당시 중형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대우 로얄시리즈에 도전하기 위해 스텔라의 최고급 모델로 소나타 2.0을 내놓았다. 그러나 기존 스텔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상품성과 성능 면에서도 독일 오펠이 설계한 로얄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국내 최장수 베스트셀러 ‘우뚝’
이 차는 ‘소(牛)나 타는 차’란 비아냥거림 속에서 한글 표기명을 ‘쏘나타’로 바꾸는 등 곤욕을 치르면서 결국 2년여간 2만6000여대 판매에 그치고 단종됐다. ‘화려한 장수’로 표현되는 쏘나타 시리즈의 시조임에도 현대차로선 쏘나타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차다.
88년 6월 쏘나타가 새롭게 태어났다. 현대가 ‘Y2 프로젝트’로 개발한 수출 전략형 중형차다. 이 차는 스텔라나 로얄 등이 뒷바퀴굴림(FR) 방식인 상황에서 국내 중형차 최초로 앞바퀴굴림(FF)을 채택해 실내공간을 넓히고 편의성을 높인 게 특징이다. 당시로선 신개념인 유선형 스타일과 인체공학적 실내 디자인 등도 호평을 받았다. 이전 차와는 완전히 달랐지만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다’는 해외 딜러들의 의견에 힘입어 차명을 쏘나타로 정했다.
Y2 쏘나타는 출시 이듬해 중형차의 지존 대우 로얄을 제치며 본격적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일본 마쓰다 626을 도입해 생산한 기아 콩코드와 2000cc급 엔진으로 중형차 시장을 넘본 대우 에스페로 2.0 등도 가볍게 따돌렸다. 약 5년간 55만대가 넘는 판매 실적을 올리며 기염을 토했다.
쏘나타
흔히 쏘나타 시리즈의 시조를 85년 스텔라 베이스의 ‘소나타’로 여기지만, 현대차는 Y2 쏘나타를 실질적인 1세대 쏘나타라고 보고 있다. Y2 쏘나타는 1991년 ABS (Anti-lock Brake System)와 CDP (Compact Disk Player) 등을 장착해 상품성을 강화한 페이스리프트(face life) 모델을 거쳐 93년 5월 ‘Y3 프로젝트’로 개발된 풀체인지 모델 쏘나타II에 배턴을 넘겼다.
2세대인 쏘나타II는 안전과 신기술을 컨셉트로 5년간 1500억원을 들여 개발됐다.
쏘나타Ⅱ
쏘나타Ⅲ
EF쏘나타
뉴EF쏘나타
美 앨라배마 공장 첫 생산 차종
지금까지 쏘나타란 이름을 사용해 신차로 출시된 차는 85년 스텔라 베이스의 소나타, 88년 Y2 프로젝트의 쏘나타(1세대), 93년 Y3 프로젝트의 쏘나타II(2세대), 96년 페이스리프트된 쏘나타III(3세대), 98년 EF쏘나타(4세대)와 2001년 페이스리프트 모델 뉴EF쏘나타에 이어 8월31일 데뷔한 NF쏘나타(5세대)까지 7가지에 이른다. 쏘나타 새 모델을 내놓을 때마다 디자인을 혁신하는 건 물론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붙는 첨단기술을 더해 빠른 변신으로 시장을 주도해왔다.
한편 Y2 쏘나타는 해외에서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현대는 89년 북미시장 공략을 위해 캐나다 부르몽에 연산 10만대 규모의 현지공장을 설립하고 2400cc급 쏘나타를 생산했다. 그러나 북미지역 소비자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부르몽 공장은 93년 가동을 중단하고, 96년 5000억원의 손실 처리를 한 채 완전히 정리됐다. 이른바 ‘부르몽의 악몽’이다.
쏘나타는 국민적 중형차로 자리잡으면서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대학 입시철이면 쏘나타 엠블럼을 몰래 떼어가는 수험생들 때문에 현대는 엠블럼 무상교체 서비스를 실시해야 했다. SONATA의 ‘S’자를 가지면 S대에 합격할 수 있다거나, 쏘나타III의 ‘III’자는 수능성적 300점을 보장한다는 소문이 나돌아서다. 쏘나타의 금장칠된 골드(GOLD) 마크가 인기를 끌자 한때 운전자들 사이에서 이 마크를 구해 붙이는 유행이 번지기도 했다.
92년 정주영 현대 회장이 국민당 대표로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정회장을 시작으로 국민당 간부와 현대그룹 계열사 사장들이 쏘나타로 차를 바꾸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회장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타던 그랜저를 타고 다니면 서민적인 대통령후보 이미지를 풍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정도로 쏘나타는 국민적 정서를 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대차 간부들은 “현대차의 힘은 쏘나타에서 나온다”는 얘기를 한다. 쏘나타 판매가 부진할 때면 ‘쏘나타가 무너지면 회사가 무너진다’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는 말이다. 지난 상반기 투싼과 산타페의 출고대기 물량이 수개월치나 밀려 있을 때는 ‘SUV 대세론’이 고개를 들다가 EF쏘나타의 판매부진-후속모델 출시를 앞둔 상황임에도-에 따른 ‘쏘나타 위기론’에 덮여 회사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기도 했다.
쏘나타는 한 차종으로서의 범위를 벗어나 국내외에서 현대차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해외에선 ‘한국차’ 하면 ‘쏘나타’를 떠올릴 정도가 됐다.
오는 10월로 만 19년, 20살을 맞는 쏘나타는 이제 ‘세계 제패’를 선언했다. 내년부터는 ‘현대자동차의 명운’이 달린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첫 생산 차종으로 투입된다. 지금까지 숱한 기록과 화제를 낳은 쏘나타가 언제까지 브랜드 명성을 이어갈지 관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