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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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고생 몸고생 ‘초선은 괴로워’

과거와 다른 모습 보여주기 심리적 압박 … 각종 정치 모임·회의 진행 방식도 ‘스트레스’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4-07-22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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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권 출신의 A초선의원에게 불면증이 찾아온 것은 ‘4·15’ 총선 직후. 핵심 측근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검찰 수사망이 턱밑까지 파고들자 A의원에게 소화불량과 함께 잠을 이룰 수 없는 증상이 찾아온 것. A의원은 요즘 검찰의 움직임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검찰의 수사 방향과 수위를 수시로 체크하지만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다. 한 측근은 “내년 4월, 이르면 오는 10월(재·보궐선거)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여론이 지역에 파다하고 이를 A의원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A의원이 마치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 같다”고 덧붙였다. A의원에게 속 깊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얘기다. 선거 직후 당선 축하전화를 했던 친구와 선후배들은 최근 전화를 끊고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A의원의 정상적 심리상태를 위협하는 요인들. 이 측근은 “모든 것을 던져 국회에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배지를 떼야 할 형편에 몰렸으니…”라며 불면증에 걸린 A의원의 불행한 처지를 설명했다.

    불면·두통 … ‘불안심리 증후군’

    A의원이 선거법을 어긴 원죄로 불면증에 걸렸다면, 중부권 K의원은 ‘말’ 때문에 지역구민들의 항의에 시달리고 있다. 발단은 5월1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나라당 당선자 총회. 관례를 깨고 회의 시작과 동시에 한 초선 당선자가 마이크를 잡고 소신(?)을 피력해나갔다. 듣고 있던 한 중진이 “의제와 다른 이야기 아닌가요”라고 지적하자 이 초선의원은 “내가 말하는데 왜 그러세요. 가만히 계세요”라며 언성을 높였다. 3선의 한 중진은 “뭐, 저런…”이라며 혀를 찼지만 언론은 ‘당찬 초선’이란 부제로 이 대화를 소개하며 초선의원들의 달라진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보도했다. 그 후 초선의원들은 너도나도 마이크 잡기 경쟁에 나섰다. K의원이 지역구민들에게서 ‘어필’을 받은 것은 그 직후. “같은 초선의원인데 당신은 왜 언론에 나오지 않느냐”는 항의였다. 선수(選數)에 무게를 두고 있는 K의원은 지역구민들의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궁리로 요즘 밤잠을 설친다. 그는 지역구 사무실 근처만 가면 머리가 아픈 현상에 시달린다.

    17대 초선의원들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일부 의원들에 국한된 현상이지만 심한 경우 불면증은 물론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스트레스는 ‘과거와 달라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17대 전체 의원 299명 중 초선의원은 187명. 62.5%에 이르는 초선의원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기대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지역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뭔가’를 보여주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자연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것이 일종의 ‘불안심리 증후군’으로 이어진다. 수도권 Y초선의원의 L보좌관은 새벽 5~6시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진저리를 친다. 하루 일정을 챙기고 뭘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려는 Y의원의 전화가 한 달째 걸려오고 있다는 것. 퇴근 전 다음날 일정을 브리핑하지만 Y의원은 새벽이면 전화를 걸어 사사건건 확인하고 챙기려 든다. L보좌관은 “잘하려는 의도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욕도 못하겠다”면서 “옆에서 지켜보면 심리적 압박감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보좌관 생활 7년차인 그는 최근 Y의원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의정활동은 마라톤과 같은 장기 레이스라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한다”는 조언을 전달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지수.



    한나라당 한 의원은 인터넷 스토커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정치적인 행위가 언론에 보도되면 곧바로 인터넷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글들이 조직적으로 올라온다. 이 인사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부드러움을 강조하고 나섰지만 네티즌들의 파상공세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돈 없는 의원들의 서울 나기도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박찬석 의원(우리당 비례대표)은 본가가 있는 대구에서 KTX로 1시간 50분에 걸쳐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서울 여의도 인근에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을 얻어 아들과 함께 쓰고 있지만 좁은 방에서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여간 거북스럽지 않다.

    낙제점 받은 한 달간 의정 활동

    홍성 출신인 한나라당 홍문표 의원은 17대 국회 출범 후 최근까지 서해안고속도로를 통해 서울과 홍성을 오갔다. 오전 7시 또는 7시30분 조찬시간을 맞추려면 보통 홍성에서 5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아침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 퇴근 때 길이 막히면 2시간 거리가 서너 시간으로 늘어난다. 만찬을 끝내고 출발하는 시간은 밤 9~10시. 홍성에 도착해 씻고 잠자리에 들면 오전 1시 전후다.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최근 서울 강서구 까치산역 근처에 원룸을 얻어 서울살이에 나섰다. 홍의원은 집을 얻은 후 깊이 잠 들지 못하는 증상이 사라질 것을 기대한다.

    17대 국회는 개원 초부터 상임위원장 배분, 김선일씨 피살사건 등으로 인한 국정조사특위 위원장 문제 등 이른바 밥그릇 싸움으로 꼬박 한 달을 허송세월했다. 7월15일 임시국회가 끝난 직후 언론은 초선의원들의 한 달 의정활동에 낙제점을 주었다. 187명의 초선의원들에게 건 기대가 남달랐지만 정쟁과 무위도식으로 점철된 행보는 과거와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초선의원들도 할 말을 찾기 힘들다. 이런 부담은 때로 무리수를 부른다. 중부권 출신 C의원의 빡빡한 일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혀를 내두른다. 일정이 빡빡하기도 하거니와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는 조급증까지 벤처 CEO를 빼다박았다. 주변에서는 ‘이런 열정과 추진력이 과연 4년 동안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영남권 K의원도 지나친 의욕과 압박감 때문에 보좌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경우. 그는 6월 중순 자신의 보좌관을 회관 집무실로 불렀다. “4급 보좌관이 하는 일이 뭡니까.” 보좌관은 정성껏 답했다. 그러자 이 의원은 다시 “5급 비서관은 무얼 하죠”라며 질문을 이어갔다. 이렇게 9급 비서까지 하는 일을 설명한 이 보좌관은 “국회의원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곧바로 복도 끝에 마련된 흡연실로 직행해야 했다.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비례대표)이 당선자 시절이던 5월 말 가장 많이 받은 전화는 “정치모임에 가입해달라”는 중진들의 가입 요청이었다. “이쪽도 오라 하고 저쪽도 오라 하는데, 가려고 하니 아는 게 없고 안 가자니 어쩐지 불안하고….” 우리당 문병호 의원(인천 부평갑)도 특정 정치모임에 스카우트 제의를 해오는 중진들의 전화를 거절하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의원은 모임 가입 요청에 “괜찮다. 지역구 일에다 상임위 활동만으로도 벅차다”며 정중히 거절했지만 무게가 잔뜩 실린 중진들의 전화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새 정치문화 만들기 열정 높이 살 만

    17대 국회가 문을 열기 전 정치인들은 각종 정치모임을 발족시켰다. 정치성향이나 출신이 비슷하면 모임을 발족하고, 심지어 초선의원 모임 등 선수(選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단체를 만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한나라당 대변인인 한선교 의원(경기 용인을)은 “당선자 시절 당선자들 간에 어떤 모임에 참여하기로 했느냐며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어떤 당선자는 ‘왜 나한테는 연락이 없느냐’고 불안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상임위 회의진행 방식 등에 대한 부담도 초선의원들의 스트레스로 곧잘 이어진다. 7월7일 우리당 조경태 의원(부산 사하을)은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 신청 없이 마이크를 잡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자 재선 출신인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경북 포항북)이 “시장 바닥에 앉아 잡담하듯 얘기하지 말고 발언권을 얻어 하라”고 면박을 줬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다른 한 초선의원은 “질의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초선의원 군단인 민노당은 ‘소수당’ 스트레스가 심하다. 천영세 의원(비례대표)의 한 측근은 주황색 표지의 국회법 책을 끼고 산다. 국회법에 ‘원내교섭단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형광펜으로 일일이 표시할 정도다. 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민노당을 ‘왕따’시킬 때마다 매번 국회법을 들고 나오자, “도대체 국회법에 어떻게 나왔기에 국회법, 국회법 하는지 내 손으로 확인하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최순영 의원(비례대표)은 7월13일 코리안 타임을 능가하는 ‘국회타임’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는 오전 9시30분에 교육위 회의를 소집한다는 연락을 받고 회의장에 가 30분을 기다렸다. 그러나 위원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야 전문위원이 와서 양당(우리당·한나라당) 간사 간에 합의가 안 돼 회의를 열 수 없다고 알려줘 회의 지연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한 초선의원은 “처음 경험하는 의정활동이라 정신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학구적으로 파고드는 초선의원들의 열정이 국회 분위기를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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