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9

2004.06.17

할리우드 통신 궁지의 부시 “영화마저 날 죽이네”

최근 개봉 ‘투모로우’ 부시 환경정책 맹비판 … ‘화씨 9/11’ 상영 땐 타격 더 클 듯

  • LA=신복례 통신원 borae@hanmail.net

    입력2004-06-11 12: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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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우드 통신 궁지의 부시 “영화마저 날 죽이네”

    영화 ‘투모로우’의 한 장면. 기상이변으로 인해 물에 잠긴 자유의 여신상.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영화가 또 나왔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만든 SF 대작 ‘투모로우’(원제 The Day After Tomorrow)다. “영화만 개봉되면 부시 낙선은 떼어논 당상”이라고 호언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이 6월25일 개봉될 예정인 데 비해 ‘투모로우’는 이미 5월28일 미 전역 3425개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며 8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영화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대재앙과 함께 빙하기가 덮친다는 내용의 재난을 다루었음에도 부시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무능력한 영화 속 대통령 때문에 극장 안에선 간간이 웃음보가 터져나온다. 언론들은 영화 개봉을 전후해 ‘투모로우’의 정치적 함의와 논란을 다룬 글을 대서특필했고 독자들의 찬반 기고도 잇따랐다.

    민주당도 대선 전략에 영화를 활용하고 있다. 환경주의자인 앨 고어 전 부통령은 순회 주민간담회를 열어 지구온난화 문제에 관해 토론할 계획이며, 민주당 외곽단체인 ‘무브온 닷 오르그(www. moveon.org)’ 회원들은 거리에서 기후변화가 가져올 재앙에 관한 전단을 뿌리고 있다. 또 네티즌들에게 영화 관람을 권유하는 한편 부시 행정부에 항의 이메일 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익스체인지’ 등 환경단체들도 개봉과 동시에 전국 주요 도시의 극장에서 환경 재앙을 경고하는 홍보지 배포 활동에 들어갔다.

    영화 속에서 대통령 얼어 죽어

    부시 대통령이 영화 ‘투모로우’로 인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그동안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는 교토의정서 비준을 계속 거부하며 환경보다 대기업의 이익을 우선 배려하는 반(反)환경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으로선 자신의 환경정책을 비판하는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영화와 관련해 언론의 구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할리우드 통신 궁지의 부시 “영화마저 날 죽이네”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는 교토의정서의 비준을 계속 거부해온 부시 대통령.

    미 항공우주국(NASA)은 개봉 전 ‘투모로우’에 대한 논란이 한창 뜨거울 때 메릴랜드주 그린벨트의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직원과 과학자들에게 영화에 대한 언론 취재에 응하지 말라는 긴급지시를 내렸다. 내부 과학자의 제보로 인터뷰 금지령이 내려진 배후에 대한 언론 보도가 뒤따랐는데, 뉴욕타임스는 “자칫 부시 대통령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NASA 스스로 입단속에 나선 것”으로 풀이했고, USA투데이는 “백악관이 NASA에 지시했다가 언론에 내용이 보도되면서 지시를 취소한 것”으로 보도했다. 내막이야 어찌됐든 부시 대통령으로선 이래저래 이미지를 구겼고, 반(反)부시 진영에 자신을 비난할 빌미를 제공해준 셈이다.

    당장 내일은 아니더라도 곧 ‘닥칠 수도 있는 일’이라는 뜻이 원제인 ‘투모로우’에는 부시 정책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대통령의 자질을 조롱하는 장면도 나온다. 거대한 토네이도가 로스앤젤레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대통령은 멍한 표정으로 부통령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묻는다. 주인공인 기상학자 잭 홀 박사(데니스 퀘이드 분)의 기상이변 경고에 대해 “한참 뒤에 걱정해야 할 일”이라며 일축했던 부통령이었다. 영화 속 부통령은 딕 체니 부통령과 빼닮은 배우 케네스 웰시가 연기한다. 실질적인 대통령이 부시가 아니라 체니라는 현실의 비아냥을 풍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가장 늦게 백악관을 나서다 허무하게도 얼어 죽는다.

    할리우드 통신 궁지의 부시 “영화마저 날 죽이네”

    할리우드와 도심을 거대한 토네이도가 휩쓸고 있다.

    또 하나 풍자적인 장면은 멕시코 국경 아래인 남쪽으로 대피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방법이라는 기상학자의 주장을 듣고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가지만 멕시코는 국경을 봉쇄해버린다. 이에 미국인들은 국경의 철망을 뜯고 불법으로 입국한다. 미국 정부는 국경을 여는 조건으로 중남미의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제의한다. 멕시코인의 불법 입국을 막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현실을 뒤엎는 이런 설정은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지위를 비웃으며 또 한번 웃음이 터지게 한다.

    에머리히 감독은 ‘유니버셜 솔저’ ‘스타게이트’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 등 SF 액션이나 대작 재난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다. 그를 상징하는 ‘문제는 사이즈’라는 문구가 말해주듯 다양한 특수효과와 화면을 압도하는 엄청난 규모의 물량 공세로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독일 출신 감독이다. 액션을 장기로 하는 그가 이번 ‘투모로우’에선 액티비스트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지 14년이 됐다. 부시 정부가 아직도 교토의정서에 조인하지 않은 것이 놀라울 뿐이다. 1000명 중 999명의 과학자가 지구온난화에 대해 우려하고 있고, 정유회사에서 자금 지원을 받는 단 한 명의 과학자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때 정부가 그 한 명의 의견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건 잘못된 것”이라며 부시 정부의 환경정책을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굳이 환경론자가 아닐지라도 반(反)환경정책에는 분노를 표할 수 있다”고 덧붙였지만 에머리히 감독은 독일 녹색당의 열렬한 지지자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중성화하기 위한 퓨처 포레스트 재단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15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환경단체들 ‘투모로우’에 찬사 일색

    할리우드 통신 궁지의 부시 “영화마저 날 죽이네”

    영화 ‘투모로우’의 장면들.

    부시 대통령의 낙선을 위해 다큐멘터리 ‘화씨 9/11’을 만들었다며 대놓고 얘기하는 마이클 무어 감독과 달리 에머리히 감독은 자신이 정치 지향적이거나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가 항상 우리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만큼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눈감을 수 없으며 문제는 미국에 있는 만큼 더 많은 마이클 무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투모로우’의 배급은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20세기 폭스가 맡고 있다. 폭스는 영화 개봉에 앞서 수개월 동안 환경단체들과 쥐와 고양이가 벌이는 듯한 실랑이를 펼쳐왔다. 영화를 홍보하는 전단이나 포스터, 웹 사이트 어디에서도 `‘지구온난화’란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폭스로선 흥행에 도움이 될 정도의 논쟁은 환영하지만 정치적인 영화로 비화하는 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단체들이 주관하는 시사회에 복사본을 제공해달라거나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구온난화의 위험을 알릴 수 있게 영화 스폰서를 서달라는 요청을 모두 거부했다. 다만 영화 웹 사이트에 여러 환경단체와의 링크를 제공하고 환경문제와 관련된 뉴스를 싣는 선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폭스의 비협조적 태도를 비난해왔으나 영화가 개봉된 뒤 찬사 일색으로 돌아섰다.

    ‘투모로우’가 박빙의 접전을 벌이고 있는 미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6월25일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이 개봉되면 시너지 효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는 게 미국 언론들의 조심스런 예상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할리우드와 각별한 밀착관계를 유지했다. 그를 위한 기금마련 행사에 스타들이 발벗고 나섰고, 에머리히 감독이 만든 ‘인디펜던스 데이’에서도 비록 백악관은 외계인의 공습을 받고 단숨에 박살이 나지만 대통령은 마침내 지구를 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클린턴 당시 대통령 역시 이 영화를 빨리 보고 싶어 제트기로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에머리히 감독을 백악관 시사회에 초청했을 정도다.

    아마 부시 대통령은 ‘투모로우’와 ‘화씨 9/11’ 두 영화를 절대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로부터 수류탄이 될지, 미사일이 될지 모를 폭격을 두 번이나 맞은 부시 선거대책 진영으로선 할리우드는 민주당 아성이라고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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