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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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헌책방서 펼쳐가는 또 다른 여행

이태원 ‘왓더북?’ 운영 크리스 치아베타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4-22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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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헌책방서 펼쳐가는 또 다른 여행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15세기 독일의 신학자 아 켐피스의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서문에 나오는 이 구절에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숱한 여행을 했으되, 지금은 책들 사이에 파묻혀 사는 푸른 눈의 외국인을 서울 이태원에서 만났다. 미국 플로리다 출신인 크리스 치아베타(Chris Chiavetta·29). 이태원에서 영어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책과 한국인 아내, 그리고 컴퓨터와 결혼한 사람이다.

    20평 남짓 공간 지난해 7월 개장

    이태원 이슬람 사원을 지나쳐 오른편 길로 200여m 더 가면 왼편에 영어 간판 ‘왓더북(What the Book)?’이 보인다. 그 안에서 키가 크고 마음씨 좋게 생긴 크리스가 책을 사러 들어온 손님에게 직접 끓인 에스프레소 커피를 내놓는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왓더북?’은 20평 남짓한 길쭉한 공간에 2000여권의 책이 있는 작은 서점이다. 그러나 대나무 모빌 등 세계 각국에서 모았다는 인테리어 소품들과 가지런한 책 진열 때문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먼지투성이의 헌책방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복수전공해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크리스는 책장도 직접 짜 거기에 책을 장르별로 빼곡하게 진열해놓았다.



    입구 쪽 코너에는 신간 서적을 비치했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헌책들의 상태는 새 책과 다름없이 깔끔하다. 종류는 소설이 70%, 나머지는 ‘론리 플래닛 가이드’나 ‘고 트래블 가이드’ ‘모던 라이브러리 클래식’ 같은 시리즈물도 있고, 불교·문학·여성·철학·실용·어린이 서적 등 다양하다. 1983년판 바이킹 펭귄사의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눈에 띄고,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의 책은 8종류나 비치돼 있어 브라이슨의 팬들을 유혹하고 있다.

    요즘 국내에선 출판 경기가 썩 좋지 않은 데다 대형서점의 틈바구니에서 작은 서점들의 폐업이 잇따르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 물정도 잘 모르는 크리스는 왜 이런 사업에 뛰어들었을까.

    “한국에서는 영어책이 너무 비쌉니다. 큰 서점들은 가격을 너무 높게 매기고요. 한국 사람들 누구나 그걸 알고 있지만 영어책이 많이 필요한 게 아니어서 그런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영어책이 필요한 외국인들은 불편함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영어책방을 하면 반응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서점을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는 외국인의 처지에서 영어책 서점을 떠올렸지만 정작 서점을 찾는 이들 가운데 30% 정도는 한국인이다. 평일엔 주로 한국인이, 주말엔 주로 외국인이 찾는데 고정 고객은 일주일에 150여명 정도.

    ‘왓더북?’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언뜻 들으면 ‘그 책 뭔데?’로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론 미국인들의 욕설인 ‘왓더퍽(What the fuck)’이라는 비아냥거림도 담겨 있다. 주인은 ‘퍽(fuck)’이 ‘푹’으로도 발음되는데, ‘푹’ 대신 ‘북(book)’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책을 친근하게 여기는 크리스의 분방한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서점 문을 여는 시간은 화~토요일까지는 낮 12시~오후 9시, 일요일은 낮 12시~오후 7시.

    영어 헌책방서 펼쳐가는 또 다른 여행

    주말엔 ‘왓더북?’이 외국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한다.

    무엇보다 ‘왓더북?’의 좋은 점은 책값에 있다. 헌 책은 새 책 가격의 3분의 1쯤 되거나 그보다 더 싸다. 새 책도 다른 대형서점보다 많게는 25%까지 싸다. 스티븐 킹의 헌 책들은 대개 4000원 수준. 다른 대형서점에선 1만1000원~1만5000원 수준이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는 대형서점에선 3만6855원이지만 ‘왓더북’에선 3만3300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The Wind-Up Bird Chronicle)’의 경우 대형서점에선 23.35달러지만 이곳에선 18.2달러다. 책값이 이처럼 싼 이유는 항공료와 도매점에서 인수할 때의 차액 등을 최소화했기 때문.

    ‘왓더북?’이 주목받는 다른 이유는 4월25일 출범할 온라인 서점(www. whatthebook.com) 때문이다. 서점에 놀러 온 그래픽디자이너 데미엔과 얘기하다 우연히 아이디어를 떠올린 크리스는 데미엔에겐 홈페이지 디자인을 맡겼고, 자신은 미국의 도매상과 직접 접촉해 웹서점을 구체화했다. 웹서점은 미국의 100만권을 갖춘 도매상으로부터 책을 공수받는다. 아마존닷컴이나 ‘YES24’ 같은 웹서점과 같은 방식으로 주문을 받고 독자에게 책을 배달할 예정이다. 온라인 서점이 정식으로 문을 열기 전이지만 크리스는 책에 대한 서평도 직접 올리는 등 준비작업에 한창이다.

    “온라인 서점도 출범 계속 전진”

    “온라인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값싼 책을 더 쉽게 가까이 할 수 있고, 자신이 받고자 하는 곳에서 배달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저는 책 냄새 나는 오프라인 서점이 더 좋습니다.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왓더북?’의 사글세는 55만원. 가게 운영비를 빼고 헌책방 운영으로 그가 아내 유혜림씨(25)와 태어난 지 7주 된 크리스 2세를 먹여살리는 데 지장은 없을까.

    “사적인 일이니 공개할 순 없지만 가족들의 생활을 잘 꾸려나갈 수는 있습니다. 서점을 시작한 것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요. 카지노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얼마 전 TV쇼에 나와서 ‘성공의 열쇠는 중단 없는 전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결코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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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는 4월25일 아마존닷컴 같은 온라인 서점을 열 계획이다.

    시원시원하게 “아무 문제 없다”를 외치는 크리스는 일주일에 최소한 책 두 권을 읽는 독서파. 지난해까지만 해도 크리스는 시인이자 메릴랜드대학 교수인 두안 부리스 등과 함께 서점에서 시 읽기 모임을 매달 가져왔다. 요즘엔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9명이 모여 북클럽을 만들었고, 매달 한 차례씩 서점에서 모임을 연다. 4월에는 여행서, 5월에는 소설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마련할 예정이다.

    플로리다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갈 때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는 ‘갭 이어(gap year)’ 기간을 가졌던 그는 몬태나주립대학에 들어가서 유럽사를 전공했다. 대학 졸업 뒤에는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며 ‘더 넓은 세계를 보고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 틈틈이 전 세계를 여행했다. 그동안 태국 멕시코 코스타리카 독일 이탈리아 체코 벨기에 프랑스 일본 등 11개국을 여행한 그는 2000년 9월 여행차 한국에 들렀다가 한국에 반해 눌러앉았다.

    크리스를 한국에 눌러앉힌 이는 영어학원에서 만난 아내 유씨. 평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제 생각대로 사는 크리스는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아직까지 한국어는 조금 알아듣는 수준이지만 장인 장모에게 친아들처럼 사랑받는다고 한다. 2003년 5월에 결혼한 뒤 자신은 영어학원 강사를 계속하며 지난해 초부터 서점 개업준비를 했다.

    “열정적이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며 야심이 크다”(유씨의 말)는 크리스는 올 가을쯤 온라인 서점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가족들과 함께 ‘책이 있는 구석방’을 떠나 태국 해변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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