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0

2004.04.15

개혁 불만 프랑스 민심 ‘좌향좌’

6년 만에 치른 지방선거 야당 좌파연합 압승…여론 수용 대폭 개각 불구 라파랭 총리 유임

  • 파리=지동혁 통신원 jidh@hotmail.com

    입력2004-04-08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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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 불만 프랑스 민심 ‘좌향좌’

    3월28일 프랑스 지방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사회당 당원들이 환호하고 있다.

    프랑스 정가에 2년 만에 다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3월28일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좌파연합이 본토 22개 선거구 중 21곳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로써 2002년 대선과 총선에서의 낙승을 발판으로 독주해온 집권 중도우파 정부는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번 선거는 각 지방의 수장 격인 임기 6년의 주의회 의장과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로, 프랑스에서 주(州)는 지역의 경제와 교육, 고용, 교통 문제 등을 관할한다. 선거 결과가 중앙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도 정치권은 커다란 관심을 보이며 이번 선거를 준비해왔다. ‘시라크 대통령-라파랭 총리’ 체제가 처음 치르는 큰 선거로, 자연히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당은 겸직이 가능한 점을 이용해 현직 장관들을 대거 출마시켜 필승의 의지를 보였고, 야당은 사회당(PS)-녹색당-공산당의 좌파연합으로 역량을 모아 이에 대응했다.

    선거 전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는 좌·우파 간 팽팽한 접전을 예고했다. 일각에서는 현 정부의 강경한 정책수행에 대한 반발의 형태로 좌파연합이 다소 우세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상이 나오기도 했으나, 그동안 지방선거에서 특히 강세를 보인 우파의 아성을 깨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집권 중도우파 최대 위기 직면

    1986년 직선제를 도입한 첫 번째 선거와 92년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좌파가 승리한 지역이 각각 두 곳에 불과했다. 이후 98년 선거를 통해 우파가 14개, 좌파가 8개 지역을 차지한 상태에서 이번 선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개혁 불만 프랑스 민심 ‘좌향좌’

    프랑스 지방의회 선거에서 나타난 ‘좌파 열풍’으로 고민에 빠진 시라크 대통령.

    3월21일 실시한 1차투표에서 좌파연합은 4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34.5%를 기록한 우파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과 프랑스민주연합(UDF)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그러나 여당 관계자들은 “원래 1차투표에서는 정부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반대표가 많이 나오는 것”이라며 애써 여유 있는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는 오히려 더 많은 국민들을 투표장으로 불러 모았다. 1차투표에서 10% 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후보자들이 겨룬 28일의 2차결선투표에서는 투표율이 3% 포인트 이상 증가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결국 좌파연합은 50.4%라는 기록할 만한 지지를 얻어 36.9%를 기록한 우파와의 차이를 더욱더 벌렸다. 이는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집권 당시 이후 좌파가 기록한 최고의 지지율이다.

    특히 좌파연합의 지지도는 지역별로 편중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전역을 아우르는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본토에서는 동부 알자스주를 제외한 모든 지방에서 좌파가 승리했으며, 해외 영토인 4개 주 중 3곳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체 26개 지역 중 24곳을 석권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통계 수치는 차치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집권 우파의 완패를 상징하는 결과들이 각 지역에서 쏟아져나왔다. 라파랭 총리가 14년간 주 의회를 이끌며 정치적 터전을 닦아온 푸아투 샤랑트 지방에서는 사회당 여성 후보 세골렌 루아얄 전 환경부 장관이 당선됨으로써 라파랭의 자존심이 또 한번 꺾이는 결과를 낳았다. 1986년 이래 18년간 오베르뉴주에서 내리 당선되며 정치활동을 계속해온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 전 대통령은 다시 한번 연임을 시도했으나 대세를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루아르 지역에서는 현 우파정권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인 프랑수아 피옹 사회부 장관이 낙승을 예상했으나 큰 표차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선거 전 르몽드지 여론조사를 통해 67%의 지지도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던 그이기에 낙선의 충격은 더욱 컸다. 북부 피카르디에서는 질 드 로비앙 교통부 장관이 겸직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수도권인 일드프랑스 지역에서는 사회당 장 폴 위숑이 현 정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부 장관의 각별한 후원을 등에 업고 출마한 여당 대변인 장 프랑수아 코페 후보를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보수층이 두터운 부르타뉴 지방과 루아르 지방 등에서는 보통·직접선거가 실시된 이래 처음으로 좌파 정치인이 지역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됐다. 새로운 역사가 쓰일 정도로 민심 변화의 물결은 거셌다.

    개혁 불만 프랑스 민심 ‘좌향좌’

    3월24일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지지를 호소하는 장 르펜(왼쪽). 퇴진 요구를 받아오던 라파랭 총리는 3월31일 단행된 개각에서 유임됐다.

    다만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N)은 12.4%의 표를 얻음으로써 득표율은 다소 떨어졌으나 여전히 프랑스 제3의 정치세력임을 입증했다.

    불과 2년 전 드골 정부 이후 가장 강력한 우파 정부를 등장시키며 시라크의 손을 들어준 프랑스의 민심은 이로써 다시 한번 방향을 선회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정부와 여당이 이끌어온 개혁정책이 국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데 있다. 연금개혁 방안과 교육의 지방 분권화, 실업수당 감축 방안 등의 사회정책은 크고 작은 시위를 불러일으키며 관련 당사자들의 반발을 샀다. 또한 성장과 고용이라는 두 가지 경제 핵심부문에서 표출되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쌓여가는 국민들의 불만을 읽지 못한 라파랭 총리는 줄곧 개혁을 밀어붙이는 전략으로 일관했으며, 이에 따라 유권자들은 현 정부에 대한 염증을 느낀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좌파연합은 우파 정부에 대한 대안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좌·우파 공방 국민들 관심 고조

    ‘4월21일’은 그동안 프랑스 사회주의의 퇴보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어왔다. 이날은 2002년 대선 1차투표가 진행된 날로, 당시 총리 조스팽 사회당 후보가 극우파의 르펜 후보에 밀려 3위로 처지면서 결선투표 진출이 좌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스팽은 결과 발표 직후 참담한 표정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사회당 지지세력은 물론 프랑스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 여파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집권 우파정부가 강력히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좌파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줄어드는 형국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 승리로 사회당은 든든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당 내외에서 흘러나오던 우려의 목소리를 일거에 잠재웠다. 이런 변화는 당장 선거 후 단행된 개각을 둘러싸고 가시화됐다.

    3월31일, 엘리제궁은 여론 변화를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큰 폭의 개각을 발표했다. 그러나 퇴진 요구를 한몸에 받아온 라파랭 총리를 유임하고 5개 주요 부처 장관 중 1명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장관들을 부처만 바꿔 재기용했다. 사르코지 내무부 장관이 경제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그 자리를 드 빌팽 외무부 장관이 물려받은 식이다.

    이에 좌파 정치인들은 즉각 강도 높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줄리앙 드레 사회당 대변인은 “시작하기도 전에 닳아빠진 정부”라고 비꼬았으며, 마리 조르쥬 뷔페 공산당 서기는 “신용이 바닥난 정부에 대한 거센 저항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라파랭 총리가 유임된 이유는 차기 대통령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사르코지 장관을 견제하기 위한 시라크 대통령의 정략일 뿐이라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선거를 통해 드러난 국민들의 변화 요구는 무시한 채 3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좌·우파 간 끊임없는 공방전 속에서도 마치 균형의 법칙이라도 존재하는 듯 주기적으로 서로 주도권을 주고받는 프랑스 정치의 묘미가 되살아나는 요즈음 프랑스 국민들은 다시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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