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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 … 후보 속타고 표심은 멀고

2004 총선 풍속도 혁명 전야 … 이중 삼중 그물망 돈·참모 못 믿어 가족 친인척 총동원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맨땅에 헤딩 … 후보 속타고 표심은 멀고

맨땅에 헤딩 … 후보 속타고 표심은 멀고

4월2일 경남 하동군 쌍계사 입구 벚꽃길에서 한 후보가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3월 말, 수도권에 출마한 A후보 선거사무실. 이 사무실의 아침은 A후보와 2~3명의 선거감시반원이 동시에 연다. 청하지 않은 손님이지만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서 채용한 이들 아줌마 감시반원들은 A후보측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사무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조금만 이상한 게 있으면 카메라를 들이댄다. 선거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무실 직원들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가슴을 쓸어내린다. 무엇보다 이들 때문에 회의를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것이 최대 난제다. 정당의 경우 도지부까지만 조직이 있다. 때문에 선거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면 바로 유사기구(사조직) 설치로 보일 소지가 많다. 이렇다 보니 편법이 나온다. 자원봉사자 회의로 명칭을 걸어놓는 것이 대표적인 임기응변. 그러나 이렇게 뒤틀린 회의에서 실속 있는 전략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2004년 총선에 출마한 각 후보들은 대부분 A씨와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들은 강하게 발령된 ‘선거법 경계경보’에 가슴을 졸인다. 달라진 선거법은 ‘숨어 있는 1인치’의 불법도 찾아낼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앞서 언급한 아줌마 감시반이 대표적인 시스템. 여기에 경쟁 후보측에서 파견한 감시원과 최고 5000만원의 포상금을 엿보는 ‘선(選)파라치’, 1계급 특진을 노리는 경찰관이 합세해 후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선거 환경이 이렇다 보니 과거처럼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밀어붙이기는 꿈도 못 꾼다. 서울 서대문에 출마한 L의원의 한 측근은 “100표를 잃더라도 선거법 준수가 우선이라는 선거운동 기준이 제시됐다”고 말한다. 이중삼중의 그물 감시망 속에 후보들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아줌마 감시반원 전담 미남계 동원

앞서 A후보의 캠프. 아줌마 감시반원의 ‘지독한’ 감시를 견디다 못해 은밀하게 맞불작전을 전개했다. 감시반원을 감시하는 ‘담당자’를 역으로 붙여놓은 것. 물론 감시반원은 이 작전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다. ‘담당자’들은 감시반원의 관심을 끄는 화제로 종일 말을 걸거나, 최신 버전의 영화 비디오로 관심을 유도하기도 한다. 아줌마 감시반원 담당자는 아무래도 인상 좋고, 입담 좋은 사람에게 역할이 돌아간다. 일종의 미남계다. 선관위가 정한 수칙에 따르면 감시반원은 밥은 물론 커피 한 잔도 얻어먹을 수 없다. 그러나 노래방에 가 화합과 친선(?)을 도모하려는 시도도 없지 않다. 서울 노원에서 출마하는 K씨는 이런 감시반을 따돌리기 위해 수시로 자신의 아파트를 찾는다. 군(軍)에서 배운 수화로 사인을 보낸 후 아파트로 가면 참모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보안이 필요한 전략이나 자금 문제 등의 회의는 보통 아파트에서 한다.



2004년 총선, 변화의 흐름은 사무실 밖이 더 거세다. 학교 운동장에 대규모 군중을 모아놓고 벌이는 합동유세와 정당연설회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한편에는 돈이 흐르는 길목을 차단하는 선거법이 버티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돈은 치명적인 독(毒)이다. 손만 대면 죽는다. 경기 용인에서 출마 예정이던 열린우리당 남궁석 의원은 부인이 돌린 10만원짜리 봉투 때문에 출마 의지를 접었다.

2004년 총선 현장은 돈가뭄이 심하다. 이는 중앙당의 돈가뭄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천막당사로 이사한 한나라당은 ‘차떼기’ 후유증으로 ‘돈’의 씨가 말랐다.

설사 있더라도 있는 티를 낼 수가 없다. 돈 선거를 하는 순간 집중포화를 맞는다. 가급적 가난한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이 2004년 총선의 또 다른 풍속도다.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는 서너 개의 이동식 화장실 신세를 져왔다. 질식할 것 같은 화장실 냄새도 견디기 힘들지만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대표실은 궁상맞기 이를 데 없다. 여성 사무처 요원들의 불평 때문에 8개의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지만 천막당사는 아직 낯선 모습임이 틀림없다. 열린우리당도 비슷하다. 얼마 전까지 당사 헤게모니를 놓고 쥐, 벼룩과 파워게임을 벌여야 했다.

가급적 돈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원칙은 달라진 비례대표 선발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3월28일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 후보 1번(소아마비 1급 여성장애인 장향숙씨)에 대항할 경쟁 상대로 S초등학교 교장 K씨(60·여)를 전격 발탁했다. 교육분야 전문가를 비례대표 상위 순번에 집중 배치한다는 전략에 부합한 인물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추천을 받았다. 이날 밤 11시, 심사위원들은 면접을 보기 위해 K씨를 국회 한나라당 대표실로 불렀다. 그러나 부랴부랴 나타난 김씨를 본 당직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선 그가 타고 온 차가 문제였다. “아들 소유”라고 해명한 그 차는 외제 명차였다. 차떼기 이후 한나라당의 차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심하다.

K씨의 화려한 외모도 심사위원들의 부담감을 가중시켰다. 당시 현장을 지켰던 당직자 S씨는 “평범한 교육전문가를 생각했는데 K씨는 강남의 부잣집 안주인 같은 이미지였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근혜 대표는 “좀더 논의하라”고 주문했다. 과거 같으면 후보의 경쟁력으로 평가될 ‘가진’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반면 신진인사들은 돈 안 쓰는, 달라진 선거문화가 차라리 편하다. 2000년 총선에 이어 경기 남부지역에 출마한 K씨는 “그때(2000년 총선)는 수시로 중앙당 지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지원은 없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만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는 이런 바뀐 분위기가 오히려 가진 것이 없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진단한다.

맨땅에 헤딩 … 후보 속타고 표심은 멀고

후보등록이 시작된 3월31일 서울 종로구 선관위에서 민주당 정흥진, 열린우리당 김홍신, 민주노동당 이선희, 한나라당 박진 후보(왼쪽부터) 등이 후보등록을 하고 있다(왼쪽). 2000년 4월 총선에 출마한 한 후보가 합동유세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돈으로 선거를 치른 경험이 있거나 돈으로 조직을 꾸린 재선급 의원들은 이번 선거가 정말 힘들다. 서울에서 출마한 P의원이 대표적인 경우. 우선 조직이 돌지 않는다. 공중전화처럼 돈을 먹어야만 움직이던 조직들이 갑자기 이를 끊으니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다. “돈 쓰면 죽는다”고 수차 얼러 봤지만 초지일관 미동도 않는 조직을 보고 결국 “일단 선거 끝나면 후사하겠다”는 편법으로 이들을 달랬다. 그러나 이미 기간조직 대부분은 와해한 상태. 쓰자니 불안하고, 안 쓰자니 찜찜하다. P의원은 남은 10여명 자원봉사자로 선거를 치르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아들과 딸의 친구들을 자원봉사자로 대거 뽑았다. 평소 아들 딸의 친구들과 식사하며 얼굴을 익힌 상태지만 자식들 낯을 봐서라도 선거 후 한턱낼 계획이다. 미국 등 정치선진국처럼 ‘자원봉사’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조직가동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출마후보들에게는 여간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대구에서 출마한 L후보측은 “액면 그대로 자원봉사자란 게 있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이다. 선거운동원 품귀에 시달리던 각 후보들은 자연 믿을 수 있는 친인척 등 가족들을 선거판에 끌어들인다. 서울 종로에 출마한 정흥진 후보(민주당)의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은 이번 선거 때문에 생업을 일시 중단했다. 벤처회사를 경영하던 큰아들 연훈씨는 홍보 업무를 맡고, 작은아들 희운씨도 비슷한 시기 생업을 접고 아버지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전담하고 있다. 또 셋째인 딸 소영씨는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아버지 홍보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어머니는 남편의 구청장 시절 얼굴을 익혔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한다. 본격 선거가 시작된 4월2일부터 정후보의 조카 등 다른 친인척들도 본격적으로 선거지원에 나섰다.

이번 선거에 가족 및 친인척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자원봉사자’를 구하지 못한 배경도 있지만 ‘믿을 사람이 없다’는 불신감도 한몫한다. 강화된 선거법에 따라 후보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고 자칫 실수를 할 경우 선거는 물 건너간다. 서울 서초갑에서 출마를 준비하다 전직 측근에 의해 이중장부가 폭로돼 출마를 포기한 박원홍 의원(무소속) 경우가 공개되면서 이 같은 불신감은 더욱 커졌다.

중부지역에 출마한 H씨. 평소 박의원과 친분을 나눴던 그는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측근 참모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다. 그는 외국에서 공부하던 아들을 급거 귀국시켜 조직과 자금 문제를 맡겼다.

또 변리사로 활동하는 동생에게 사무실 전체 흐름을 관리감독하라고 지시했다. H씨가 이런 지시를 내린 이유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있을지 모를 대립과 갈등에 대한 대비책이다. 그는 지금 참모들과 신뢰관계가 형성됐더라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금 관계가 좋은 참모가 나중에 선거자금 등을 무기로 협박을 할지 알 수 없다. 자연 돈 문제 등과 같은 예민한 ‘사항’은 평생 등을 돌릴 수 없는 가족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아들과 동생의 등장으로 H씨의 불안감은 상당 부분 누그러졌다.

가족들이 나선 선거판에는 브로커가 설 공간이 없다. 설사 있더라도 철저하게 찬밥신세로 전락했다. 출마 후보들과 브로커의 연결고리는 십중팔구 ‘돈’이다. 이 고리가 선거법에 의해 차단되면서 과거 선거의 핵심 축이었던 브로커의 역할이 사라진 것.

음식점 등 선거 특수는 옛말

상인들 역시 돈 없는 선거가 가져다준 선거불황에 목이 멘다. “선거 특수는 옛말”이라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G음식점 주인 Y씨는 빨리 선거가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민주당 인근에 위치한 이 식당은 지난 총선 및 대선까지만 해도 선거 특수에 휘파람을 불던 집.

현장에서 손발이 묶인 후보들은 미디어 선거로 승부한다. 후보들이 인터넷을 파고드는 것도 같은 이치(상자기사 참조).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2004년 총선 풍속도는 가히 선거혁명을 예고한다.





주간동아 430호 (p30~32)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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