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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은 나의 분신이다!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입양 후 돌보고 가꾸고 … 자신이 꿈꾸는 삶 표현 ‘대리 만족’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인형은 나의 분신이다!

인형은 나의 분신이다!

20대 젊은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구체관절인형. 공 모양의 관절이 있어 포즈가 자유롭고 얼굴형, 안구, 메이크업, 머리 모양 등을 바꿀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의례용이나 유아기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던 인형의 세계가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파는 산업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익명성을 띠고 디지털화할수록 인형 속에 흐르는 피는 점점 더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물론이고 남자 대학생, 여성 직장인과 60대 전문직 종사자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인형을 ‘입양’해 키운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곰 인형에서부터 그 유명한 바비와 최근 선풍적 인기를 끄는 구체관절인형, 인형계의 ‘명품’ 마담 알렉산더, 갓난아이를 빼닮은 슈슈 등에 이르기까지 인형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인형 컬렉터들도 크게 늘고 있다.

옷 입히는 일 그 자체가 행복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가 키우는 인형 ‘토마순’은 그에게 친구 이상의 존재다. 몇 년 전 독일에서 이효재씨 세 자매가 똑같은 인형을 구입해 하나씩 나눠 가졌다는 특별한 사연이 있기도 하지만, ‘토마순’에게 말 걸고 바라보고 옷 입히는 일 그 자체가 그에게는 행복이다. 매년 어린이날이면 ‘토마순’에게 양말 한 켤레씩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는 “세 자매가 똑같은 인형을 샀지만 화장을 고치고 머리 모양을 바꿔 지금은 얼굴이 제각각 달라졌다”고 말한다. 특히 동생이 구입한 인형은 지금 소설가 이외수씨 집에 입양됐는데 “점점 이외수씨의 터프한 외모를 닮아간다”며 웃는다.



천연염색전문가인 신순자씨도 아들 둘을 다 키우고 지금은 인형 셋을 ‘키운다’. 옹알이하는 아기 ‘슈슈’와 네덜란드에서 입양한 ‘큐빅’, 또 다른 하나는 인형을 좋아하는 것이 알려져 선물로 받은 마담 알렉산더 ‘앤젤’이다.

“큐빅은 로테르담에 건축 공부를 하러 갔다가 ‘큐빅하우스’라는 건축물을 돌아본 뒤 그 앞 시장에서 구입한 건데, 인형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얘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만난 순간을 기념해서 큐빅이라 부르지요.”

신씨가 소장한 마담 알렉산더는 1923년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독특한 입매와 수공예 작업, 샤넬, 아르마니 디자이너들에 의해 만들어진 화려한 의상 등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 백화점 명품관 등에서 수입해 팔고 있는데 10만~300만원의 고가지만, 월급을 모아 1년에 하나씩 입양하는 진짜 컬렉터층이 형성될 정도로 인기가 있다. 서울대 경제학부 2년생인 오모군도 자타가 공인하는 인형 마니아다. 그는 만나자마자 “바비와 켄의 결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을 정도다. 그는 특히 만화나 영화의 캐릭터를 정교하게 만든 인형 ‘액션 피겨’ 컬렉터로 “영화적 상황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인형은 나의 분신이다!

1920년대 우리나라의 전통 인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형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김영준 소장)

세계 최고의 인형이라고 할 수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후기 구석기 시대)가 다산을 기원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형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의 꿈과 소망을 표현하는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지금도 인형을 만들거나 가진 사람들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이 꿈꾸는 또 다른 삶을 인형에 불어넣는 것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형의 꿈이 다산이나 풍년 같은 공동체의 바람에서 현대에 이르러는 개인의 사적 감정이나 영화의 한순간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인형은 대량 생산시대에서 점점 더 수공예적 특성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또 다른 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인형을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20대에게 인기 있는 구체관절인형이나 최근 청담동에 문을 연 맞춤형 곰 공작소 등은 다른 상품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인간과 인형 사이의 유니크한 관계를 상품화한 좋은 예다.

팔, 다리 등에 동글동글한 관절을 넣어 다양한 포즈가 가능한 구체관절인형은 1970년대 영국에서 태어나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브라이스 등 외국 브랜드들, 구체관절인형 동호인들이 아예 회사를 차려 생산하기 시작한 국내 브랜드 ‘아이’, 그리고 개인적인 인형 공예제작자들의 작품들이 있다. 인형 가격은 10만~100만원대이고 옷이나 신발, 모자 등 모든 패션용품이 생산, 판매된다.

“인형의 소유자가 성형할 수 있다는 게 구체관절인형의 가장 큰 특징이지요. 우레탄이나 점토로 만들기 때문에 얼굴형도 바꿀 수 있고 안구, 가발, 메이크업까지 다 바꿀 수 있거든요. 어떤 날은 요염하게, 어떤 때는 눈썹을 깔아서 슬프고 청순하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성취감을 느낍니다.”(백경숙, ‘아이’ 대표)

‘가장 좋은 친구를 만드는 곳’이란 카피를 내걸고 서울에서 문을 연 곰 공작소 ‘빌더베어’(Build-a- Bear)는 8단계에 걸쳐 자신만의 인형을 직접 만들 수 있게 한 것이 마케팅 포인트다. 곰, 강아지, 고양이, 돼지 등 40가지 동물 중 몸통 하나를 고르면 직접 솜을 채우고,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빨간 하트에 소원을 빌어 가슴에 넣게 된다. 운동복, 군복, 소방수 옷 등 수백 가지 옷과 액세서리로 곰 인형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출생증명서’를 받으면 ‘나만의 곰’이 태어난다. 물론 그전에 만만찮은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의 ‘너의 테디베어가 되고 싶어’란 노래가 있다. 곰인형은 틴에이저부터 로맨스그레이에게까지 사랑의 상징이다. ‘빌더베어’는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가장 새로운 컨셉트’상을 수상하며 세계에 150곳 매장을 설립한 맥신 클라크 사장의 말이다.

인형은 나의 분신이다!

인형을 키우는 수집가들, 명품 마담 알렉산더, 곰 공작소 ‘빌더베어’ 매장 모습(위부터).

인형은 이미지와 조각, 공예, 패션을 종합적으로 결합한 문화 상품이다. 그러나 부가가치가 높은 고가의 인형은 대부분 일본과 미국 등에서 수입된다. 우리나라에서 어른이 인형을 사거나 갖는다는 게 ‘금기’시돼 성인층을 겨냥한 고가의 인형을 아예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효재씨는 “외국 인형의 정교한 형태와 의상 등은 내가 인형에 관심을 갖는 또 다른 이유다. 인형은 훌륭한 디자인 상품”이라고 말한다.

인형옷의 국산화 방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는 이영선씨(동덕여대 디자인대학원)는 “외국 인형옷이 베르사체 같은 톱 디자이너들에 의해 제작되는 등 인형 산업이 나날이 발달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인형 붐이 일기 시작됐지만, 모두 수입돼 안타깝다”고 말한다.

1년에 4~5점의 구체관절인형을 만들어 분양하는 한 인형공예가는 “자동차 모형을 수집하는 것이나 인형을 수집하는 것이나 성격은 똑같다. 그러나 인형을 갖고 논다고 하면 정신적 퇴행이니 ‘키덜트’(kid+adult)니 하며 이상하게 본다. 일본에선 인형 공예도 장인에 의해 맥이 이어지는 예술이기 때문에 오늘날 뛰어난 작품을 수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서울 홍익대 앞의 한 구체관절인형매장에서 만난 직장여성 김모씨 역시 “인형과 논다고 하면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듯 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인형마니아 동호인들이 자기방어적 성향을 띠기도 하지만,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생활도 잘 해나가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인형 수집가인 김영준씨는 “1920년대 세계의 대표 인형 12개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던 우리 인형의 맥이 끊어진 것은 70년대 무렵이다. 수출을 위해 싸구려 봉제, 플라스틱 인형만을 만들다 중국에 시장을 잠식당해 전통인형 산업이 쇠퇴일로를 걷게 됐다”고 말한다.

심우성 공주민속박물관장은 “한국적 인형이 있었다면 우리 문화가 지금처럼 병들어 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적 인형’은 무덤 속 부장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생활 속에 살고 있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출해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인형의 모습이 시대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인형들이 한결같이 외롭고 처량해 보이는 것도 여전히 인형을 ‘여자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치부하는 냉정한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간동아 424호 (p68~69)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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