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4

2004.03.04

메이저사들 “시나리오 어디 없소”

독창적 소재 바닥, 베스트셀러 각색 급급 … 오스카상 각본상 후보는 미국 밖 영화들 점령

  • LA=신복례 통신원 borae@hanmail.net

    입력2004-02-26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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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사들 “시나리오 어디 없소”

    2004년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 후보에 오른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한 장면(위)과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의 한 장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제작사들이 실종 광고를 냈다. 독창적인 영화 아이디어를 찾는다는 내용이다. 광고 전단 한쪽에는 ‘외국이나 독립영화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됐으며, 보신 분은 꼭 메이저 영화사로 연락해주기 바란다’는 문구가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물론 영화사들이 실제로 실종 광고를 낸 건 아니다. 독창적인 각본이 잘 나오지 않고, 참신한 아이디어조차 구경하기 힘들어진 최근의 할리우드 현실을 빗대 한 말이다.

    제76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이 2월29일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열린다. 오스카상을 주관하는 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이에 앞서 1월27일 영화상 각 부문 후보작을 발표했다. 각본상 후보작 목록을 보면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 오리지널 각본의 샘이 메말라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후보작은 모두 5편. 캐나다 출신의 드니 아르캉이 각본을 쓰고 감독한 ‘야만인의 습격’(The Barbarian Invasion), 영국 출신의 스티븐 프리어즈가 감독한 ‘더럽고 예쁜 것들’(Dirty pretty things·각본 스티브 나이트), 아일랜드 출신의 짐 셰리단이 각본을 쓰고 감독한 ‘천사의 아이들’(한국 개봉 제목, 원제 In America),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딸 소피아 코폴라가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원제 Lost in Translation), 그리고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원제 Finding Nemo)가 그것이다.

    메이저 영화사 작품은 단 한 편도 끼여 있지 않다. 모두 미국 밖 영화 아니면 독립영화 감독 출신들이 만든 작품들이다. 배급만 메이저 영화사들이 맡았다. 메이저 영화사들은 지난 3년을 통틀어 후보작에 간신히 한두 편만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유니버설 진행작 중 1편만 오리지널



    심지어 지난해에는 후보작을 고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지 영어로 쓰이지도 않은 영화 두 편이 각본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다. 혹자는 오리지널 각본이 사라진 오늘날의 할리우드 상황을 화석만 남긴 채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맘모스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메이저 영화사들도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만든다(근래 들어선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대부분 베스트셀러를 각색한다. 작품성이나 상업성에서 이미 인정받은 작품을 통해 흥행의 위험을 줄이겠다는 의도에서다. 메이저 영화사들이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들고, 오스카상 수상을 위해 엄청난 홍보비를 쏟아 부으며 밀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것이다.

    1억 달러짜리 대작 ‘반지와 제왕: 왕의 귀환’, 해양액션 블록버스터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미스틱 리버’ ‘씨비스킷’ ‘콜드 마운틴’ ‘모래와 안개의 집’(House of Sand And Fog), ‘큰 물고기’(Big Fish)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 영화는 작품상과 각색상을 비롯해 각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오리지널 각본의 미래는 더욱 암울할 수밖에 없다.

    현재 메이저 영화사들이 제작 중인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니버설은 현재 15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그중 단 한 편만이 오리지널 각본이다. 나머지는 모두 속편이거나 만화, 옛날 영화, 텔레비전 쇼, 논픽션이나 소설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엠지엠(MGM)은 제작 중인 영화 4편 모두 옛 영화를 리바이벌했다. 워너브러더스는 올해 21편을 내놓을 예정인데, 그중 오리지널 각본은 7편에 지나지 않는다. 7편 중 2편도 자서전과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메이저사들 “시나리오 어디 없소”

    영화‘마스터 앤드 커맨더:위대한 정복자’의 러셀 크로우.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한국영화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한국영화의 스토리와 구성이 탄탄해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 고갈에 허덕이고 있는 할리우드가 영화 소재를 얻는 창구를 전 세계적으로 다원화했기 때문이다. 2001년 미라맥스가 ‘조폭 마누라’를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엠지엠이 ‘달마야 놀자’, 워너브러더스가 ‘해안선’, 마돈나의 매버릭 필름이 ‘엽기적인 그녀’, 그리고 최근에 드림웍스의 ‘장화, 홍련’에 이르기까지, 요즘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영화 리메이크 판권 구입이 붐을 이루고 있다. 스스로 개발하는 대신 미국시장에서도 먹힐 만한 한국영화의 독특한 소재와 기획력을 돈 주고 사들이는 것이다.

    시장에서 이미 검증받은 작품들에 대한 미국 스튜디오들의 의존은 미국영화 각본계의 지형도마저 바꾸어놓았다. ‘스팅’ ‘차이나타운’ ‘로키’ ‘애니홀’ ‘디어 헌터’ 등 197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오리지널 각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오리지널 각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스콧 프랭크, 에릭 로스, 스티브 자일리언 등 유명 시나리오 작가들도 오리지널 각본을 쓰기보다 각색에 매달리고 있다. 눈길을 사로잡는 기발한 이야기로 일단 이름을 얻고 나면, 또다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베스트셀러란 안전판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1급 시나리오 작가는 한 편을 각색하는 데 200만 달러를 받으니, 새로운 시나리오를 들고 위험을 무릅쓰는 걸 꺼리는 분위기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스튜디오가 이들의 창작 욕구에 찬물을 끼얹으니 창의성이 풍부한 시나리오는 더더욱 구경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씨비스킷’을 각색하고 감독한 게리 로스는 한 인터뷰에서 “‘씨비스킷’이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무명 소설이거나 오리지널 각본이었다면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수많은 감독이나 작가들이 명성을 얻기 전에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튜디오 관계자들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보면 등장인물의 성격에서부터 사건 하나하나까지 물고 늘어지며 논쟁을 벌이지만, 일단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존경심’을 갖고 대하기 때문에 제작에 대한 결정도 비교적 쉽게 내려진다는 것.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오리지널 각본을 꺼리는 건 영화사들의 기업적 성격이 바뀐 것에서도 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소니, 유니버설, 20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 등의 스튜디오들은 거대 복합미디어 기업에 속하는 자회사들이다. 과거 스튜디오 제작자들이 영화팬으로서 영화에 대한 일말의 순정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들은 영화를 돈벌이 수단이자 젊은이 취향의 레저 타임용 엔터테인먼트 정도로 생각한다.

    자신의 시나리오 ‘물병자리의 시대’(Age of Aquarius)를 들고 수년 동안 스튜디오 관계자들을 쫓아다니다 결국은 톰 클랜시 소설의 ‘베카의 전사들’(The Sum of All Fears)을 각색한 영화로 데뷔한 작가 겸 감독 필 앨든 로빈슨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은 오리지널 각본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스튜디오들은 각본을 보고 ‘이게 정말 좋은 영화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지금의 스튜디오들은 ‘이 프로젝트가 영화사업부의 비즈니스 플랜으로 채택될까. 금융계에선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장 궁금하게 여긴다.”

    상업성이 독창성을 대체한 할리우드. 결국 매년 수백 편이 넘는 나쁜 영화들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작가들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감독들 또한 베스트셀러를 각색해 만든 영화들로는 자기 색깔을 고집할 수 없기 때문에 판에 박힌 ‘할리우드표’ 영화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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