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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딱 반했어요, 사무라이”

러시아, 초밥부터 만화영화까지 일본 열풍 … 고급 동양문화 이미지 확실히 구축

  • 모스크바=김기현 동아일보 특파원 kimkihy@donga.com

“홀딱 반했어요, 사무라이”

“홀딱 반했어요, 사무라이”
”사무라이 같은 각오로 대통령선거에 나갑니다.”

3월14일로 예정된 러시아 대통령선거에 나선 이리나 하카마다(49) 전 하원부의장은 공식석상에 나설 때마다 비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는 러시아 사상 첫 여성 대통령후보. 지지율이 70%가 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벽을 넘기에는 벅차지만 그의 투지는 대단하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가정이지만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러시아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일 뿐 아니라 첫 외국계 대통령이 된다.

그의 성(姓)과 외모를 보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금세 알아차리겠지만 그는 일본인 2세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의 공산주의자였던 하카마다 무쓰오(袴田陸男).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으로 망명한 하카마다는 극동 하바로프스크에서 니나 이오시포브나를 만나 결혼해 이리나를 낳았다.

기업인 출신의 이리나는 일본계라는 사실이 그에게 전혀 약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 정치권에서 승승장구했다. 하원의원과 중소기업위원장(장관급), 야당인 우파연합 공동대표와 하원부의장을 거쳤다.



일본인 2세 이리나 대권 도전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그가 일본인2세라는 사실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이라는 점이 더 큰 핸디캡”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다. 러시아 국민들이 그만큼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뜻일까.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여성 사무라이’를 자처하고 나섰는데도 러시아 유권자들은 오히려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다.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선거에 뛰어드는 모습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 사무라이의 이미지를 느끼는 것일까.

하카마다와 대선에서 겨룰 푸틴 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재산을 공개했는데 두 권의 책 출간으로 생긴 인세 수입이 포함돼 있어 화제를 모았다. 출간한 책 중 한 권은 자서전이고, 다른 한 권은 ‘푸틴과 함께 배우는 유도’라는 유도 입문서다.

유도 7단의 유단자인 푸틴 대통령은 “유도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도에 심취해 있다. 유도의 본고장인 일본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작은 키에 날카롭고 다부져 보이는 푸틴 대통령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러시아 사내’가 아니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돈하기 좋아하고 책임감이 강한 푸틴 대통령에게서는 왠지 일본풍이 느껴진다.

정치권의 친일(親日)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러시아 곳곳에서 ‘일본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식당가. 예전 모스크바의 일식당은 일반인과 거리가 멀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음식값이 비싸다는 한 일식집의 경우 일반인들은 감히 식사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 드나들고 마피아 조직원들이 흔히 타고 다니는 검은색 지프 몇 대가 서 있는 주차장…. 하루 종일 손님이래야 몇 명 되지도 않았다.

알고 보니 이곳은 어느 마피아 조직이 돈세탁을 목적으로 연 업소였다. 불법적으로 번 돈을 세탁하려고 합법적인 사업을 가장해 문을 연 것. 겨우 조직원들의 모임 장소로나 사용됐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아예 드나들지 못하도록 터무니없는 음식값을 받고, 오히려 손님을 귀찮아했던 것이다.

크렘린 인근의 러시아 호텔 안에 있는 고급 일식집 도쿄(東京) 역시 식사시간 때도 넓은 홀이 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 손님들도 러시아인보다는 외국인이 더 많았다.

“홀딱 반했어요, 사무라이”

지난해 모스크바에 문을 연 일본식 스테이크 하우스. 각각 러시아어로 출간된 무라카미 류(왼쪽)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작품집(왼쪽부터).

이런 일식당의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 계기는 모스크바 곳곳에 ‘스시 바’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다. 초밥 요리 위주로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스시 바’는 부담 없는 분위기와 값으로 일식의 대중화를 불러일으켰다.

플라네타 스시(초밥성ㆍ星)라는 체인점이 큰 인기를 끌면서 모스크바 시내에만 수십 곳의 일식집이 문을 열었다. 심지어는 큰 양식당이나 중식당의 한쪽에다 ‘스시 바’를 여는 경우까지 생겼다.

‘일식 하면 스시’라는 등식도 무너졌다. ‘스시 바’에 이어 닭고기나 야채 등을 재료로 한 일본식 꼬치구이 전문점 ‘야키도리야’ 체인도 생겨났다.

지난해 모스크바 중심가의 푸슈킨 광장에 일본식 스테이크하우스인 베니하나(紅花)까지 문을 열었다. 베니하나는 일본뿐 아니라 미국 한국 등 전 세계 100여개 도시에 체인망이 있는 유명 브랜드. 데판야키 등 일본식 철판구이를 요리사의 묘기를 보며 맛볼 수 있다. ‘스시 바’와 달리 스테이크만 1500루블(약 6만원)이 넘는 고급 식당이다. 그래도 점심때는 인근의 직장인들이 ‘비즈니스 런치’를 먹으러 몰려들고 저녁에는 평일에도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 사이에서 일식은 ‘유행’이다. 보드카를 곁들인 기름진 러시아 음식 대신 사케와 함께 담백한 일식을 먹는 것이 ‘중산층’을 상징하는 문화적 코드로 자리잡은 것. 한 고급 일식집의 매니저는 “예전에는 포크로 초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서툴더라도 젓가락질을 배우려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일식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전쟁 패배 나라에 열광 아이러니

일식당이 갑작스레 늘어나면서 일본인 주방장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모스크바 시내의 몇 군데 일식당에는 일본인 대신 한국인 주방장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훈련을 받은 러시아인 주방장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곳 일식집들은 인테리어도 일본색이 물씬 풍기게 꾸몄다. 여종업원도 일본인과 외모가 비슷한 동양계 한인동포나 브랴트인 등 소수민족 출신의 젊은 여성들이 많다.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일식 열풍은 지방으로도 번져 멀리 시베리아에까지 일식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독서계에도 일본 열풍이 불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와 무라카미 류(村上龍)가 특히 인기. 모스크바 시내 대형 서점에는 일본 소설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부터 ‘1973년의 핀볼’ ‘노르웨이의 숲’ ‘댄스 댄스 댄스’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작품이 러시아어로 번역돼 나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지난해만 해도 ‘양을 둘러싼 모험’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더욱 ‘급진적’이라는 평을 듣는 무라카미 류도 ‘69’ 등이 소개된 후 고정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대통령 스포츠’가 된 유도 말고도 합기도 검도 가라테 등 일본에서 건너온 무도를 배우는 청년들도 늘어났다. 일본영화 특히 애니메이션의 인기도 대단하다.

일본문화는 어느덧 동양문화, 그중에서도 고급문화를 대표하게 됐다. 서구문화와 다른 이색적인 분위기가 러시아인들에게 ‘먹히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꾸준히 이미지를 구축해온 일본의 노력이 빛을 보고 있다.

올해는 러ㆍ일 전쟁 100주년이 되는 해. 과거 치욕스런 패배를 안겨줬던 적국의 문화에 열광하는 러시아인들의 태도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와 일본은 여전히 쿠릴열도의 영유권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일본 기업은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미루고 있다. 그러나 일본문화의 확산은 일본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러시아 시장에서 전자제품은 한국에, 자동차는 유럽에 밀려 고전해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자동차의 판매가 급격히 늘어났다. 일본문화 열기가 경제효과로 이어진 것이다. 반면 모스크바의 한식당들은 서둘러 메뉴에 일식을 추가해야 했다. 일본풍을 밀어내고 유라시아 대륙에 ‘한류(韓流)’가 상륙할 날은 언제쯤일까.



주간동아 424호 (p54~55)

모스크바=김기현 동아일보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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