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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최병렬 동파사고

한나라당 ‘黨 청산 시나리오’ 있다

지난해 11월 작성된 ‘재창당 로드맵’ 문건 입수 … 노대통령 탄핵에 당력 집중 제안, 최대표 고집으로 무산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한나라당 ‘黨 청산 시나리오’ 있다

한나라당 ‘黨 청산 시나리오’ 있다

박근혜 의원은 최병렬 대표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한나라당 구당모임 의원들이 2월18일 밤 국회에서 최병렬 대표와의 면담에서 결말이 없자 다시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소장파와 중진 모두에게 사퇴 압력을 받던 최병렬 대표가 2월22일 “공천 완료 후 전당대회에서 대표를 선출하자”며 자신의 사퇴 일정을 분명히 함으로써 내분으로 치닫던 한나라당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물론 “최대표가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겉으로는 서로를 향해 겨눴던 칼을 거둬들인 상태. 이제 국민들의 관심은 ‘한나라당의 자발적 변신’이 어떻게 이뤄질지에 모아지고 있다. 과연 한나라당은 달라질 수 있을까.

‘주간동아’는 한나라당 핵심조직이 지난해 11월 말 자체적으로 마련한 ‘한나라당 청산’을 전제로 한 ‘재창당 로드맵’ 관련 문건을 입수했다. 이 문건이 작성될 때만 해도 한나라당은 혼란스럽기는 해도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난해 11월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당을 청산하는 극단적 처방을 써야지만 급변하는 정국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문건이 만들어질 당시 정국은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후폭풍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재신임의 방법과 절차를 두고 정가는 논란이 한창이었고 일각에선 재신임 자체가 위헌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었다. SK그룹에서 100억원대의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에 건네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은 큰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아직 ‘차떼기’ 수법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불법 대선자금이 추가로 드러날 것이라는 위기감이 한나라당을 감싸고 있었다.

‘100석 이하 전락’ 자체 평가했다 여권 분열 후 낙관론 대두

이 문건은 첫머리에서 현 상황을 “구소련 붕괴 후 옐친 시절의 러시아와 흡사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국민들은 노무현의 국정파탄에도 불구하고 불법 대선자금 문제를 구체제의 종식이라고 보고 있으며, 한나라당은 ‘구소련의 공산당’과 같은 처지”라고 묘사하고 있다. 문건은 이어 “시대의 흐름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있다”며 앞으로 정국의 주도권이 노대통령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문건은 또 “현시점 정당지지도보다 ‘총선에서 어느 정당을 지지할 것인가’가 유권자의 일관된 정치의식을 반영한다”며 지난해 11월20일자 여론조사를 근거로 한나라당이 23%, 열린우리당이 28%, 민주당이 10%의 총선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정당지지도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선두를 다투고 있었지만, 이 무렵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미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에 지지도의 선두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어 문건은 “획기적 변화 없이는 100석 이하로 (한나라당의) 의석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문건은 또 ‘한나라당에 닥쳐올 현실’에 대해 한마디로 “SK 외에 다른 기업의 대선자금 규모가 추가로 폭로될 경우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또 문건 작성 무렵 최대표가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대표 단식을 통한) 국회 마비는 국정파탄의 책임을 한나라당에 떠넘기려는 노무현의 수에 말려든 꼴”이라며 “결국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 불신만 가중시키고 말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결국 “한나라당 간판으로 단순히 공천개혁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기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여론은 최대표 중심의 공천 물갈이가 아니라 한나라당 자체의 청산을 포함한 근본적인 정치질서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지난해 연말부터 당내 일각에서는 당 청산이라는 극약처방이 아니고는 한나라당을 살릴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음에도 2월11일 소장파를 중심으로 최대표 퇴진 요구가 나오기까지 두 달 반 이상 한나라당은 겉으로는 ‘평온’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최대표의 한 측근 인사는 “여권의 분열 이후 ‘3자 필승론’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아무리 바닥이어도 3당 체제로 나서는 이상 영남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둘 것이라는 낙관에 상황 판단을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와서 보면 웃기는 얘기지만 지난해 연말까지도 3당 체제로 선거를 치를 경우 180석에서 200석까지 얻을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었다. 들리는 얘기가 이런데 누가 감히 당을 깨는 개혁을 하자고 입을 열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3개월 전으로 돌아가 문건은 또 한나라당의 총선 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우선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로 ‘한나라당의 청산과 새로운 정당의 건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대통령 하야 및 탄핵’에 당력을 모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불법 대선자금 파문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지난 연말, 실제 한나라당 핵심부에서는 노대통령 탄핵 또는 하야를 실제 상황으로 몰아가려는 궁리가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회창 전 총재의 역사적 퇴장’ 상당 부분 현실로

이 같은 야권의 궁리를 청와대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한나라당이 내홍에 빠지면서 그 가능성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1월 말까지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연합해 대통령 탄핵에 나설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두고 청와대 관계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탄핵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될 경우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것인지, 최종 판단 기관인 헌법재판소에서는 어떤 판단을 내릴지 등을 두고 시뮬레이션까지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추가로 불법 대선자금 수수가 드러나고 2월 들어 당 내분을 겪으며 탄핵안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평가된다.

문건은 탄핵공세와 함께 진행될 한나라당의 재창당 시나리오도 소개하고 있다. 재창당 로드맵은 크게 3단계로 구성돼 있다.

먼저 1단계는 ‘방어 국면’. 검찰의 추가 비자금 폭로 직후 ‘한나라당 청산’을 전격 선언하자는 것.

2단계는 ‘방어 및 공격의 혼합 국면’으로 이회창 전 총재가 검찰에 출두해 대선자금을 법적으로 책임질 것을 선언하는 한편, 이 전 총재 및 측근 그룹의 역사적 퇴장 및 한나라당의 청산과 새로운 보수세력 창출의 도화선을 마련하며, 나아가 노대통령도 검찰수사를 받고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는 것. 실제 이 제안은 상당 부분 현실로 옮겨졌다. 지난해 12월15일 이 전 총재는 대선자금 모금의 법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요지로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한 직후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이 전 총재가 희생하는 지도자로 부각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이 전 총재의 검찰 출두에 대다수 국민들은 당황스러워했지만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그의 고백과 검찰 출두가 본격적인 공세로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3단계는 ‘공격 국면’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격의 카드는 노대통령이 이미 약속한 “재신임 국민투표 실시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대통령 탄핵과 하야로 정국을 반전시키자는 것이다. 4단계 ‘최종목표 및 달성국면’에서는 한나라당 청산 및 새로운 보수개혁정당을 창당하고 재신임 국민투표에 전력투구하며 총선에서 선전해 차기 대선 승리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돼 있다.

문건은 전체 과정에서 “최대표와 이 전 총재, 박근혜 의원 등 중진, 소장파의 전략적 역할분담을 통한 전방위적 공세가 필요하다”고 부연하고 있다. 특히 박의원처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정치인이 당 개혁 등 중요 어젠더의 주창자로 나서 한나라당의 보수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도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청산과 신당 창당에 대해 문건은 별도의 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3개월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 현재 진행 중인 한나라당 재창당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이 문건이 사실상 신당 창당을 요구하는 당내 세력들 간의 지침으로 활용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낳고 있다.

‘야당 창당시 유의사항’이라는 제목의 문건 마지막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창당의 주체로 “노무현의 국정 방향에 반대하면서,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중립적 외부인사를 중심으로 외부에서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창당 방식으로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과 국민회의 청산처럼 당 밖에서 신당을 만들고 한나라당 주력이 한나라당을 탈당해 신당으로 옮겨가고 한나라당은 청산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었다. 창당의 간판으로 문건은 학계와 시민단체 인사 등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이어 문건은 “이런 외부 흐름에 당내 개혁적 중진그룹 및 소장파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창당 논의를 진행하고, 여기에 비대위 및 최대표가 합류하는 방식의 창당 흐름이 바람직하다”고 부연하고 있다.

아울러 문건은 ‘한나라당 청산 책임자’로 우리당 창당과정에서 끝까지 민주당에 남아 있다가 마지막에 우리당에 합류한 ‘정대철 의원과 같은’ 궂은일을 맡아줄 인물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정적 이미지를 지닌 인사들을 최대한 한나라당에 잔류, 고사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덜한 인사가 한나라당에 끝까지 남아 청산작업을 진행하고 마지막에 신당에 합류한다”는 것. ‘부정적 이미지가 덜한 인사’로는 김덕룡 의원을 거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문건은 백지상태에서 한나라당 청산과 재창당이라는 정계개편의 시나리오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문건은 결정적 상황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당의 재창당 과정에 중심을 잡아줘야 할 최대표의 리더십이 지금처럼 흔들릴 것이라는 점을 놓친 것. 최대표도 이 방안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거취와 관련한 요구는 철저히 무시한 것이 좀더 빠른 당 재건을 막은 장애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불법 대선자금 사건이 터질 무렵 이미 한나라당 청산만이 살길이라는 당내 고민이 있었다는 점 자체는 의미 있어 보인다. 실제 최근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다가올 전당대회를 재창당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가고 있다. 재창당 로드맵이 앞으로 한나라당의 변신에 어떻게 활용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주간동아 424호 (p12~14)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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