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1

2003.11.27

치고… 받고… 한나라 ‘위기의 계절’

SK 비자금 희생양 세우기 내전 또 가열 … 개헌론·총선 물갈이 파열음 점점 고조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3-11-19 1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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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고… 받고… 한나라 ‘위기의 계절’


    11월14일 정보채널이 탄탄한 한나라당 내 몇몇 인사들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문건’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A4 용지 9장에 SK 비자금 국면을 벗어나기 위한 한나라당의 대응방안을 구체적으로 담은 이 문건의 핵심은 비자금 정국의 국면 타개를 위해 ‘SK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과 만나 고해성사 후 사면으로 현 상황을 정리하면 정치권 전체가 검은돈과 야합했다는 비난을 받고, SK 비자금 100억원을 받은 한나라당이 비난의 한가운데 설 것이므로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이 문건은 희생양의 이름까지 거론해 당내 인사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당 재정국 실무라인만 책임질 경우 희생양을 내세웠다는 역풍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윗선인 최돈웅 또는 정치적 무게가 실린 김영일, 서청원 선까지 내놓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한다.” 이렇게 분석한 이 문건은 특히 “이 선(희생양)의 조정과 관련, 이회창 전 총재와 협의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작성자가 현 지도부 측근, 또는 주변인물임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이 문건은 “지금은 이 전 총재를 제거하기보다 이 전 총재를 활용해야 할 시점”이라며 “이 전 총재 지지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어야 희생양을 내세우는 데 따른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문건 내용을 전해 들은 서청원 전 대표측이 당장 발끈했다. “선거운동 한 죄밖에 없다”며 “전형적 책임 떠넘기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일 의원측도 마찬가지. “한나라당을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등에 비수를 꽂는 격”이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이런 문건을 만들어 득 볼 사람이 누구냐”며 현 지도부와 그 주변사람들에 대해 강한 의심을 내비쳤다. 반면 최병렬 대표측은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문건 내용을 들은 최대표의 한 측근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라며 희생양론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임을 인정했다. 양 진영은 취재진에게 문건의 진위 여부와 출처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SK 비자금에서 출발한 회오리가 한나라당을 강타한 지 한 달, 한나라당 곳곳에 균열과 파열의 흔적들이 널려 있다. 문건을 접한 인사들의 반응은 이런 한나라당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 지도부의 영(令)이 서지 않은 지는 이미 오래됐다. 현안마다 치받는 소속의원들의 하극상(下剋上)도 다반사다. 특히 SK 비자금 문제를 놓고 당내 각 계파의 대응전략이 엇박자로 터져 나온다. 비자금 문제와 관련 전·현 지도부는 책임 문제를 놓고 서로 전가하거나 희생양을 찾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총선 공천과 관련한 전·현 지도부의 파워게임도 갈수록 불을 뿜을 수 밖에 없다. 특검법 통과 등 원내 과반수당의 역할과 위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부를 휩싼 위기감은 커지고 있다.

    최대표는 최근 측근들로부터 “홍사덕 원내총무 퇴진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보고를 받았다. 최대표는 “당이 혼란에 휩싸인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이재오 사무총장 등 몇몇 강골 인사들은 “중·대선거구제와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잇따라 제기한 그를 그냥 둘 경우 당이 혼란에 휩싸여 궁극적으로 제2의 이민우 사태(1987년 내각제 개헌 파동)가 올 수도 있다”며 퇴진운동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앞서 최대표도 홍총무에게 “지금은 투쟁할 시기이지 개헌할 시기가 아니다”며 제지했다. 그러나 홍총무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최대표측이 이처럼 홍총무를 강하게 견제하는 것은 분권형 개헌론 속에 숨은 ‘비수’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치고… 받고… 한나라 ‘위기의 계절’

    당사를 팔아 SK 비자금을 갚자는 주장의 배경에는 최병렬 체제를 흔들려는 의도도 있다는 것이 한나라당 지도부의 시각이다.당 개혁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1월3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 및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 도중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왼쪽)와 홍사덕 총무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오른쪽).

    최대표측은 우선 홍총무와 서 전 대표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개헌론을 들고 나온 점을 주목한다. 서 전 대표는 11월12일 최대표, 강재섭 김덕룡 의원 등과의 조찬회동 후 “개헌론에 원칙적으로 합의, 내년 1월경 개헌을 발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홍총무의 개헌론에 골머리를 앓던 최대표는 곧바로 “합의한 적이 없다”며 이를 부인했다. 그럼에도 서 전 대표측은 가는 곳마다 개헌론을 전파했고 보다 못한 최대표는 기자들에게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지…”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나라당의 붕괴와 정치판 판갈이로 이어질 수 있는 개헌론을 들고 나온 이면에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게 최대표측의 시각이다. 서 전 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용학 의원은 11월 초, “한나라당의 죽음을 준비합시다”는 공개편지를 통해 대선자금 문제에 대한 당 지도부의 대응에 불만을 나타냈다.

    최대표측은 개헌론, 임시전당대회 조기 개최, 당사 및 연수원 매각 주장 등은 최대표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한다. 모두가 재창당을 위한 명분 쌓기라는 게 최대표측의 시각이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당내 비주류들이 그랜드 플랜을 짜놓고 대표를 흔들고 있는 것 같다”며 “경우에 따라 분당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대표측은 최근 서 전 대표가 당내 인사 40여명을 집중적으로 만나 개헌문제에 대한 의논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고받았다. 결국 개헌문제가 공론화할 경우 서 전 대표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최대표측은 서 전 대표측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총선과 관련한 대대적인 물갈이 구상을 파악, 사전에 이를 막기 위해 시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미 최대표측과 서 전 대표측은 총선 공천을 놓고 치열한 수싸움과 세싸움에 돌입한 상태다. 서 전 대표측은 앞서 언급한 문건 내용처럼 SK 비자금 수사와 관련 수사선상에 서는 것을 대단히 우려한다. 법적 책임이 아닌 도덕적 책임문제라도 총선정국에서는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표측은 서 전 대표가 개헌론을 들고 나온 배경에는 이처럼 대선자금에 관련된 불씨가 자신을 덮칠 것을 계산, 국면을 전환시켰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방어를 위한 공세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반면 서 전 대표측은 최대표가 SK 비자금 정국을 활용, 이회창 전 총재를 비롯 서 전 대표와 가까운 인사들을 밀어 내려는 의도를 보인다고 발끈한다. 이미 내년 공천을 둘러싼 양진영의 첨예한 대립은 중앙당 주변을 감싸고 있다. 앞서 언급한 출처불명의 문건에 대해서도 “안 봐도 아는 것 아니냐”며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서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소장파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물갈이 기류도 진원지가 당 지도부라는 의혹을 품고 있다. 당내 미래연대와 쇄신모임 등이 들고 나온 용퇴론이 정치개혁과 체질개선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당내 권력체계의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최대표는 최근 전국구 100% 물갈이론을 공개했다. 이는 비례대표 3선인 홍사덕 총무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당내 이런 기류 때문인지 과거 이 전 총재 계열과 서 전 대표 인맥들 일부는 최근 일고 있는 물갈이론에 대한 부담 등을 이유로 줄 바꾸기 현상을 보이고 있다. 서 전 대표측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홍사덕 총무가 비상대책위원회 인사들과 ‘맞짱’을 뜰 것처럼 분위기를 잡는 한편으로 서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내 일부세력들은 ‘반(反)최라인’ 구성에 들어갔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흘러 나온다.

    치고… 받고… 한나라 ‘위기의 계절’

    한나라당 정병국, 전재희, 권오을(왼쪽부터)의원이 11월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구당위원장직 사퇴를 선언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공세에 최대표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대표는 돈과 조직 등으로 무장한 ‘3김’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없다. 시대 변화에 맞는 다원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런 최대표의 물에 물 탄 듯한 지도력은 정국현안마다 수십 가지 당론을 양산시켰다. 결국 사공 많은 배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은 최대표의 당 장악을 방해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최대표의 부족한 리더십은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될 경우 더욱 두드러지게 돼 있다. 이재오 총장은 최근 서 전 대표, 김영일 전 총장, 최돈웅 전 재정위원장 등을 만나 “비자금 사건 해결에 적극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선 사람은 없었다는 후문이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내용을 알아야 대응할 것 아니냐”며 “전 지도부 인사들은 모두 ‘나는 내용을 잘 모른다’는 식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최의원의 말을 믿고 ‘야당탄압’이라며 초강경 자세로 나갔다가 최의원이 돈 받은 것을 시인, 당을 한꺼번에 위기로 몰아넣은 현상도 전·현 지도부의 불협화음과 대화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것. 최대표측에서는 “SK 비자금 문제를 자꾸 끌어서 당에 좋을 게 뭐가 있느냐”며 “검찰에 나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불만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당 지도부 한 관계자는 14일 검찰에 출두한 김 전 총장의 경우 “정말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전했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김 전 총장만 해도 낫다. 이 전 총재의 측근이나 실제 자금내역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지역으로 몸을 피했다”며 결국 “검찰이 가자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비자금 수사와 관련한 당의 대책이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시인했다. 이 인사는 “소장파는 소장파대로 자신들만 살겠다며 지구당위원장직을 사퇴하는 등 정치 이벤트를 벌이고 원로들은 물갈이에 대비한 모임을 만들어 목소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최대표를 위협하는 당내 흐름이 전방위로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상처 깊어 위험한데 약은 없어…”

    최대표는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 얼굴에 난 검버섯을 제거하는 미용수술을 받았다. 노쇠했다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주변에서는 “훨씬 젊게 보인다”며 덕담을 건네지만 최대표가 밟고 있는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SK 비자금은 여전히 그의 인후부를 노리고 있고, 당 지도부의 갈등 또한 조기 봉합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소장파들의 물갈이론을 전해 들은 당 중진들이 최대표만 만나면 “말려달라”며 부담을 안긴다. 문제는 산적해 있는데 해법은 없으니 최대표로서는 벼랑 끝에 서 있는 형국이다.

    예전 기준으로 보면 총선을 5개월 정도 앞둔 요즘은 조직정비나 공약개발 논의 등 총선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검찰과의 전쟁으로 체력의 대부분을 소진했다. 더 큰 문제는 그 싸움이 언제 끝날지, 당이 입을 상처가 어느 정도일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당 지도부의 알력과 갈등이 조기에 봉합되지 않을 경우 분당의 위기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당 개혁을 외치는 일부 소장파 인사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며 “총선이 임박할 경우 이들의 선택은 안 봐도 뻔하다”며 분당 또는 대규모 탈당 가능성을 시사했다.

    손길승 SK 회장이 “표적사정 들먹여 100억원을 줬다”는 ‘주간동아’(410호 참조) 보도가 나간 직후 당직을 맡고 있는 수도권 원외지구당위원장 A씨는 최대표의 핵심 측근에게 이런 고민을 호소했다고 한다.

    “13일 지역구를 돌아다니며 ‘한나라당 ○○○위원장입니다’라고 지역주민들에게 인사했는데 주민 한 사람이 ‘아, 그 도둑×들 당’이라고 쏘아붙였다. 아내와 함께 그 욕을 먹었으니…. 이제 당분간 지역구 활동을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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