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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창 | 지는 ‘모스크바’ 뜨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모와 계략의 무대 vs 예술과 낭만적 배경

  • 이명재/ 자유기고가

음모와 계략의 무대 vs 예술과 낭만적 배경

음모와 계략의 무대 vs 예술과 낭만적 배경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도시는 아마도 수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사진)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두 도시의 이미지에는 어딘가 대조적인 점이 있다. 모스크바는 주로 옛 소련 시절 KGB(비밀경찰 및 첩보조직) 등 첩보원들 간의 음모와 계략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주무대였다. 반면 페테르부르크는 ‘닥터 지바고’ ‘안나 카레리나’ 등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영화들의 훌륭한 배경이 됐다. 제정시대와 공산체제라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기도 하지만 도시의 전체적인 색깔이 그만큼 다르기도 하다. 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로 대표되는 옛 소련의 어딘가 무겁고 칙칙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곳으로 비쳐진다.

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지금 한창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제정 러시아 수도였던 이 도시는 올해 창건 300주년을 맞아 지난달부터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벌이고 있고, 이 행사는 연말까지 계속될 예정이 다. 이 축제가 세계의 이목을 적잖게 끌고 있는 것은 기념행사가 단순히 시 차원이 아니라 러시아 정부에 의해 국가적 규모로 치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사 준비위원장이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현 수도도 아니고 러시아 제2의 도시인데, 이 정도 일에 대통령이 직접 나설 것까지 있었을까. 이 도시 출신인 푸틴 대통령의 개인적인 ‘애향심’의 발로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푸틴이나 러시아 정부는 이 행사를 통해 다목적 포석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푸틴으로서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는 이벤트를 주도함으로써 개인적 인기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내년 봄 대선에서 재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 같은 의도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정치적 계산과 무관하게 이번 페테르부르크 축제 자체가 갖는 상징성은 대단히 커 보인다. 그건 무엇보다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가 러시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적지 않은 의미에서 비롯된다. 이 도시는 탄생 자체가 유럽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의 서구화·근대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명은 이 도시를 세운 황제 ‘피터(Peter) 대제’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부른 것이다. 러시아식으로 부르자면 ‘피요트르’가 돼야 하나 이 황제는 굳이 독일식 발음을 고집했는데, 그만큼 그는 강력한 친(親)서구화(근대화)론자였다. 2m가 넘는 거구의 이 황제는 네덜란드의 조선기술을 배우기 위한 산업연수단을 모집하면서 그 자신이 직접 조선공으로 위장해 산업연수원에 참가하기도 했던 괴짜였다.



그의 ‘탈(脫)러시아주의’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는 러시아 남자들이 전통적으로 기르던 수염까지 자르게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겐 수염세를 부과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유럽에서 많이 떨어진 모스크바를 버리고 유럽과 가까운 곳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네바강 습지에 새 도시를 건설했다. 12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공사 끝에 유럽풍의 도시가 세워졌고 1703년 천도가 이뤄졌다.

이런 탄생 배경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 오랫동안 양립해온 두 가지 조류, 즉 슬라브적 독자주의와 친서구주의 가운데 후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왔다. 건설된 지 300년 남짓한 이 도시의 이름이 그동안 페트로그라도-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 등으로 파란만장한 유전(流轉)을 겪은 것도 러시아 역사 속 두 조류 간 갈등과 진통의 자취다. 푸틴 대통령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서구의 정상들과 만나 회담을 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은 그 같은 상징성을 극대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서구에 활짝 문을 여는 러시아, 그리고 피터 대제에 이어 제2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젊은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혁명을 현장에서 취재한 미국의 좌익 언론인 존 리드의 생애를 그린 영화 ‘레즈(reds)’는 페테르부르크가 10월혁명의 포연과 함께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을 모스크바에 넘겨주고 조연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계속 그 자리에 머물 것으로 보였던 옛 수도는 그러나 90년 만에 다시 ‘주연’으로 부활하고 있다.



주간동아 391호 (p95~95)

이명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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