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9

2003.06.19

‘석삼년 아홉 해’ 수행한 까닭은

‘바리’ 내면의 길 찾기 혹독한 통과의례 … 무당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 신화는 여전히 진화중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입력2003-06-11 1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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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삼년 아홉 해’ 수행한 까닭은

    바리가 생명수를 가지고 돌아오자 폐허됐던 불라국이 부활한다.

    현대의 신화는 판타지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것은 소설로, 영화로 다시 태어난다. 때때로 신화의 상징과 이미지를 차용한 광고 영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지의 제왕’처럼 고대신화를 재현하는 영화가 삭막한 현대인의 삶에 옹달샘이 되어주기도 한다. ‘몬스터주식회사’ 같은 애니메이션에서는 현대의 도시 공간 저편에 존재하는 ‘지하국’의 ‘오래된 도깨비’들이 다시 살아난다.

    신화가 신화인 이유는 상징과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는 욕망의 ‘상징’이다. ‘몬스터주식회사’에서는 도깨비와 지하국의 ‘이미지’가 현대의 옷으로 갈아입고 새롭게 태어난다.

    유니코리아 픽쳐스㈜의 애니메이션 ‘바리공주’ 역시 신화와 애니메이션이 판타지를 매개로 서로 잘 어울리는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선우 감독이 쓴 초기의 시놉시스와 원화 초안으로 맛깔스럽게 정리된 바리데기 이야기를 새롭게 듣는 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이야기의 삽화들이 사라진 우리 신화의 틈새를 메워 새로운 신화를 그려내고 있으니 맛깔스러울 수밖에!

    신화 읽기의 묘미



    바로 이 지점에 신화 읽기의 묘미가 있다. 신화의 상징과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또 그 해석에 따라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낼 것이냐?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게임이다.

    바리데기 신화의 주제가 ‘효’라는 이도 있고 ‘버림받은 딸의 정체성 찾기’라는 이도 있다. 또 ‘현실의 질곡에 맞서는 여성성’으로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필자는 새로운 관점으로 보고 싶다. ‘무당 되기’가 주제가 아닐까 한다.

    왜 이렇게 하나의 신화를 놓고 서로 다르게 해석할까?

    우리 신화는 일부 건국신화 외에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우리 신화는 무당의 입에서 입으로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노랫말 속에 살아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면서 신화의 줄거리나 에피소드가 변형되거나 삭제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수많은 세대를 거쳐오면서 불교와 유교, 때로는 도교와 혼합되고 억압과 고난 속에서 변신을 거듭해왔다. 더군다나 노래하는 무당에 따라서도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이야기본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신화는 내재된 상징을 읽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바리데기 신화에서는 어떤 상징이 핵심이 되는가?

    ‘석삼년 아홉 해’ 수행한 까닭은

    바리공주.선경에 살면서 생명수를 지키는 신선 무장승. 바리와 결혼하여 일곱 아이들을 낳는다(작은사진).

    바리가 ‘키는 하늘에 닿을 듯하고 눈은 등잔만 하고 얼굴은 쟁반처럼 크고 손은 솥뚜껑 같고 발은 석 자 세 치인’ 무장승을 만나는 장면을 한번 보자. 바리가 무시무시한 무장승에게 세 번 절을 하자 무장승이 바리에게 묻는다.

    그대가 사람이뇨 귀신이뇨?날짐승 길버러지도 못 들어오는 곳에어떻게 들어왔으며, 어디서 왔느뇨?나는 국왕의 일곱째 대군으로, 부모 살리러 왔나니물값 가져왔냐? 아차 중에 잊었나니풀값 가져왔냐? 바삐 오는 길에 잊었나니나무값 가져왔냐? 자주자주 잊었나니밑 빠진 두멍에 물 삼 년 길어주소 불 삼 년 때어주소낫 없이 나무 삼 년 베어주소석삼년 아홉 해를 살고 나니

    필자는 바로 이 ‘석삼년 아홉 해’가 가장 핵심적인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바리데기는 무장승을 만나기 전까지 생명수를 찾아 온갖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멀고 먼 길을 여행했다. 그것을 ‘길 찾기’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왜 무장승을 만나서 ‘석삼년 아홉 해’ 동안 물 긷고, 불 때고 나무하는가? 물론 생명수를 얻기 위해서다. 여기서 상상력을 발동시켜보자. 이 지점을 단순하게 ‘그랬나 보다’ 하고 읽고 넘어가면 신화 읽는 묘미를 놓치기 십상이다.

    힌트가 하나 있다. 무장승이라는 캐릭터가 바리데기 신화의 다른 본에서는 무장신선 혹은 무장선관으로 나온다. 드디어 ‘승’이 아니라 ‘신선’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무장승은 이름이 ‘무장’이고, 그 직함이 ‘승(僧)’이거나 ‘신선(神仙)’이리라. 아니, 원래 신선이었으나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승으로 바뀌었다고 봐야 한다.

    자, 신선 무장을 만난 바리가 아홉 해 동안 일을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스승 밑에서 수련할 때 마치 통과의례처럼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과정 말이다.

    그렇다면 3년 동안 물 긷고 3년 동안 불 때고 3년 동안 나무하는 일은 바로 수행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리가 처음 무장신선을 만났을 때 절을 세 번 했다는 것은 바로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삼년 아홉 해’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일(노동)과 수행이었던 것이다. 바리는 그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무장이 생명수를 찾는 바리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대가 길어다 쓰는 물이 약수이니 가져가고베던 풀은 개안초이니 가져가오 뒷동산 후원의 꽃은 숨살이꽃, 뼈살이꽃, 살살이꽃이니 가져가오

    바리가 3년 동안 길어다 쓰던 바로 그 물이 생명수이고, 3년 동안 베던 풀이 곧 눈을 뜨게 하는 풀이며 3년 동안 거닐던 바로 그 ‘뒷동산’의 꽃이 숨을 쉬게 하고 뼈와 살을 살리는 꽃이었던 것이다. 비록 말은 무장신선의 입을빌려 나왔지만, 그 깨달음은 바리의 ‘석 삼년 아홉 해’의 길 닦음 전체를 울리는 것이다. 아니, 추운 겨울날 검은 빨래를 희어지도록 빨고, 끝없는 논을 갈고, 무쇠다리 아흔아홉 칸을 놓아준 그 험난한 고난과 저승 가는 길에서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를 만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물었던 그 내면의 길 찾기 전체를 함께 울리는 것이다. 생명의 열쇠는 바로 ‘지금 여기’의 물과 풀과 꽃이었던 것이다.

    ‘석삼년 아홉 해’ 수행한 까닭은

    바리를 키워준 비리공덕 부부가 살던 집 전경.

    그 깨달음의 의미는 뒤에 나오는 바리의 노래에서 알 수 있다. 오구대왕을 살린 후 바리는 이렇게 말한다.

    소녀가 부모 곁에서 잘 입고 잘 먹지 못하였으니 만신의 인위왕이 되겠나이다

    부모 곁에서 잘 입고 잘 먹지 못하였으면, 오구대왕이 주겠다고 하는 나라의 반을 받든지 재물의 반을 받아서 이제부터라도 잘 먹고 잘 입으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바리는 왜 권력과 재물을 마다하고 ‘부모 곁에서 잘 입고 잘 먹지 못하였으니’ 만신의 인위왕이 되겠다고 했을까? 여기서 ‘만신’은 무당을 뜻한다. ‘만신의 인위왕’이란 무당의 시조로서 신이 되겠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못 먹었으니까 만신의 왕이 되어서 저승 가는 길목에 지키고 앉아 절밥도 받아먹고 무당밥도 받아먹겠다는 것인가? 실제로 그와 같은 구절도 있다.

    바리공주는 인도국 보살이 되어 절에 가면 한 상 가득히 공양을 받고, 들로 내려오면 큰머리 단장에 은아몽두리 입고 언월도와 삼지창, 방울과 부채를 손에 든 무당이 되어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도록 마련하였다

    더군다나 바리는 자신뿐 아니라 남편 무장과 아이들, 그리고 자기를 길러준 비리공덕 할미 할아비가 먹고 입고 살게 해달라고 오구대왕에게 요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바리의 말을, 이제까지 못 먹었으니까 이제라도 챙겨 먹겠다, 이렇게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렇게 읽는 사람은 돈만 아는 선무당이나 돌팔이 무당만 봐온 게 분명하다.

    내림굿에는 무당의 앞날을 알아보는 ‘녹타기’라는 순서가 있다. 내림굿을 받는 신딸이 그릇에 든 맑은 물, 쌀, 잿물, 돈, 흰 콩, 여물, 뜨물의 일곱 가지 녹 가운데서 어느 것을 먼저 여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신딸이 ‘돈’을 먼저 열면 내림굿을 주재하는 신어머니나 선배 무당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무당에게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맑음의 상징인 ‘맑은 물’이 가장 중요한 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리의 말을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기 위해서’ 무당이 되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무장이 평토제를 받아먹고 살고, 비리공덕 할미가 별비를 받아먹고 살고, 바리의 일곱 아들이 저승의 십대왕이 되어 먹고산다고 할 때, ‘제삿밥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신의 직능을 맡았다는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잘 먹지 못하였으니’라는 구절과 ‘제삿밥을 받아먹는다’는 구절을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연결하면 얼토당토않은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석삼년 아홉 해’ 수행한 까닭은

    추운 겨울날, 바리가 검은 빨래를 희게 빨던 얼음산.선경을 걷고 있는 바리.바리가 ‘끝없는 밭’을 갈고 있는데 갑자기 밭들이 스스로 일어나고 있는 장면.(왼쪽부터)

    그렇다면 바리는 왜 하필 ‘부모 곁에서 잘 입고 잘 먹지 못하였으니’ 만신의 왕이 되겠다고 하였을까? 필자는 그 사이에다 ‘소녀와 똑같이 부모 곁에서 잘 입고 잘 먹지 못한 다른 소녀, 더 나아가 인간을 위해서’라는 말을 넣어서 읽는다. 그래야 무리 없이 의미가 통하는 것이다.

    황해도 내림굿에서 신어머니가 신딸의 머리를 풀어 다시 올려주면서 내리는 공수를 들어보자. 신어머니는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으라고 소나무 가지에 맑은 물을 묻혀 신딸의 머리에 뿌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천지신명 다 맑은 물에 내려주시니 마음이 편하고 욕심을 갖지 말지어다 한없이 맑은 마음을 가지고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길 모르는 사람 길 가르쳐주고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외로운 사람 벗이 되고

    신이 된 최초의 무당 바리의 깨달음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지 않은가? 아마도 이 노래야말로 무당의 시조신으로서의 바리가 신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부르는 노래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이렇게 확장되어가는 바리의 깨달음을 확인함으로써 그야말로 ‘석삼년 아홉 해’가 상징하는 일(노동)과 수행이 무당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한국의 무(巫)는 근대적인 이론화 과정을 밟은 적이 없다. 체계화한 경전이 아니라 신화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국 무의 지평을 신화의 상징체계에서 찾는다. 그 상징의 다리를 두드리며 우리 신화를 새롭게 읽어가는 묘미를 터득해야 재미있는 신화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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