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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람, 조용히 사라지겠다”

이회창 전 후보 옥인동 자택서 신변정리 … 명동성당 미사 참석 등 천주교회에서 마음 안정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잊혀진 사람, 조용히 사라지겠다”

“잊혀진 사람, 조용히 사라지겠다”

한나라당 박성범 전 의원, 신은경씨 부부가 2002년 12월28일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를 만난 뒤 서울 옥인동 이 전 후보 자택을 나서고 있다. 이 전 후보 자택에는 요즘 한나라당 관계자, 지인 등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2002년 12월20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6층 대통령후보실. 2층에서 ‘눈물의 정계은퇴 기자회견’을 마친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가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첫번째 방문객은 이 전 후보 개인후원회인 부국팀 회장단. 이들의 뒤를 이어 이 전 후보 보좌역들이 후보실로 들어왔다.

10명의 상근 보좌역들은 이 전 후보 앞에 일렬로 섰다. 이 전 후보는 맨 왼쪽부터 한 사람씩 악수를 해나갔다. 기자회견장에서 흘린 눈물보다 훨씬 많은 눈물이 이 전 후보의 뺨을 타고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나눌 경황도 없었다. 이 전 후보는 악수를 끝낸 뒤 선 채로 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 고생 많이 했다. 여러분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더 이상 회한이 없지만 젊은 여러분들의 앞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여러분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이 전 후보는 이 만남을 끝으로 한나라당을 떠났다. 대통령후보실은 썰렁하게 비어 있다. 기자회견을 마친 ‘패장’은 더 이상 말이 없다. 대선 이후 10여일이 지나는 동안 이 전 후보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 주로 머물며 부침으로 얼룩졌던 7년 정치생활을 조용히 정리하고 있었다.

보좌역들에게 “미안하다” 눈물 쏟아

이흥주 전 특보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 전 후보에게 ‘연말연시에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시라’는 건의를 드렸다”고 말했다. 2002년 1월1일 신정 때 이회창 총재의 가회동 자택엔 1000여명의 세배객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룬 바 있다. 당시 이총재는 차기 대통령 후보 1순위로 꼽혔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정계은퇴를 선언한 마당에 정계 인사들로부터 새해 인사를 받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으므로 신정 때 아예 서울을 떠나 있으라는 게 측근들의 건의다. 여행지를 영남지방으로 잡을 경우 영남 민심을 자극한다는 등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여행지도 신중하게 선택해야 된다는 의견도 올라왔다. 이 전 후보 부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전 후보의 한 측근은 “정확히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격세지감’이 들 뿐”이라고 말했다.



“잊혀진 사람, 조용히 사라지겠다”

한나라당 이회창 전 후보, 한인옥 여사, 최병렬 의원이 한 천주교회 미사에 참석했다(왼쪽). 이 전 후보 개인후원회 부국팀 사무실 전경. 부국팀은 2002년 12월 말 해체될 예정이다.

이 전 후보는 은퇴 후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두 번 찾았다. 12월22일 일요일 세종로교회 미사에 참석했고, 크리스마스인 25일엔 명동성당 미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명동성당에 머물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은 이 전 후보와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 후보는 혜화동성당에서 열린 부친 이홍규 옹의 영결미사 때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 전 후보는 다른 곳에서는 엄격한 태도를 잃지 않지만 유독 천주교회에서만큼은 마음의 안식처로 여기는 듯 속내를 드러낸다는 게 측근들의 말이다.

이 전 후보의 다른 측근 A씨는 최근 옥인동 자택을 방문해 이 전 후보를 만난 뒤 기자에게 “이 전 후보가 심하게 감기에 걸린 듯했다”고 전했다. 이후보는 은퇴 기자회견 뒤 통원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한인옥 여사도 많이 수척해졌고 건강도 예전처럼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게 A씨의 전언이다. 이 전 후보는 대선 유세 때 “너무 강행군하는 것 아니냐. 몸살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감기에 걸릴 시간이 없다”고 답했다. 한여사는 대구 서문시장 유세에서 상인들이 자신의 유세 연단 앞으로 몰려들자 “고맙다”며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A씨는 “한 달간의 선거기간 동안 전국을 몇 번씩 순회하던 이 전 후보 부부의 열성적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옥인동 자택에는 요즘도 새벽마다 10여개의 신문이 배달된다. 이 전 후보는 신문을 정독하는 스타일이다. 한 측근은 “이 전 후보는 명판결문을 많이 쓴 판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말보다는 글을 편하게 생각했으며,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글을 더 신뢰했다”고 전했다. 이 측근에 따르면 이 전 후보는 요즘도 신문을 펴 든다고 한다. 이와 관련, 김영삼 전 대통령 한 측근은 “매일 아침 신문 1면이나 주요면에 자신의 이름이 실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정치인은 묘한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영향력을 크게 행사해온 정치인일수록 은퇴 직후의 상실감 또한 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잊혀진 사람, 조용히 사라지겠다”

이회창 전 후보는 대선 패배 후 정치생활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다.

이 전 후보의 요즘 하루 일과는 단출하다. 이재관 수행부장은 “이 전 후보는 정치활동을 해오면서 신세를 진 분들에게 감사의 전화를 하면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옥인동 자택을 찾는 방문객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전 후보는 방문객이 오면 1층 접견실에서 주로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눈다. 서청원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랑 당직자와 의원, 이 전 후보의 특보, 그리고 이후보가 정치생활을 해오면서 인연을 맺어온 각계 인사들이 주로 방문한다. 12월22일 이후보는 정책특보, 비서실 관계자들을 각각 자택으로 불러 점심,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23일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위로전화를 받았다. 25일엔 대선 때 홍보를 맡았던 관계자들이 자택을 찾았다. 이 전 후보는 “여러분들이 수고를 많이 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 전 후보는 약속장소로는 서울시내 호텔 회의실 등을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어 사람이 붐비는 장소는 잘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사랑’ 조직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재검표 주장에 대해 이 전 후보는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다. 23일 이 전 후보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및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와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선대위 해단식은 취소됐다. “한나라당은 재검표에 성의를 보이라”며 이 전 후보 지지자들이 선대위 존속을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 후보는 이날 권철현 의원을 통해 “모든 게 제 탓이고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다”고 말했다.

수천명의 각계 전문가들을 회원으로 두면서 이후보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온 부국팀은 2002년을 끝으로 해산될 예정이다. 26일 이흥주 특보는 이 전 후보에게 부국팀 해산을 최종 보고했다. 서울 여의도 부국증권 내 부국팀 사무실 임대계약은 2002년 12월로 만료되며 재계약은 하지 않을 계획이다. 다만 사무실 중 일부는 ‘이회창 변호사 사무실’로 쓰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부국팀 관계자는 “이 전 후보가 정치 활동이나 변호사 활동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거 이 전 후보가 이곳에 사무실을 둔 적이 있어 일부만 존치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후보는 2002년 1월 미국 방문 때 ‘아시아 소사이어티’ 주최 모임에서 한 미국인이 “차기 한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소개하자 영어로 “한국 선거법 위반”이라고 농담을 던져 폭소를 자아냈다. 버클리대 스칼라피노 교수와의 만남은 통역 없이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딕 체니 부통령과의 면담도 자연스럽게 진행돼 10월 한나라당 의원들의 백악관 방문 때 백악관 관리들은 이 전 후보를 극찬했다. 3월 일본 방문 때 이 전 후보는 고이즈미 수상과의 회동 하루 전 고이즈미 수상의 스승인 노교수와의 만남에서 일본어로 대화를 했다. 이 교수는 “내가 들어본 일본어 중 이 전 후보의 일본어가 가장 품격이 높다”고 평가했다. 이 전 후보는 사법연수원 교수시절 일본어 강좌를 열어 연수원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흥주 전 특보는 “이 전 후보의 미국, 일본 방문은 단순히 사진 찍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은퇴 후 감기몸살 심해 통원치료

“이 전 후보는 미국, 일본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신뢰감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는 등 지난 5년간 4강 외교를 남다르게 준비해왔다”는 게 이 전 특보의 주장이다. 이 전 후보의 낙선과 정계은퇴 소식이 해외에 알려진 뒤 미국, 일본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교포들로부터 위로편지와 전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전 특보는 “이 전 후보나 우리로서는 어떻게 아쉬움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전 후보의 마지막 메시지는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으로부터 조용히 사라지겠다’는 것이었다. 양휘부 전 특보는 “이 전 후보는 자신의 소임을 다 했다고 보고 있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하지 않으며 자신을 잊혀진 사람으로 만들어달라는 게 이 전 후보의 뜻이다. 이 전 후보는 영원히 잊혀지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367호 (p22~24)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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