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8

2002.11.07

안방극장 ‘사극 인기’ 식을 줄 모르네

‘역사+상상력’에 대리만족 현대극 압도 … 특정인물 성공 스토리 극 전개도 ‘탄탄’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2-10-31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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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극장 ‘사극 인기’ 식을 줄 모르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진 10월23일 오후, 경기 용인의 한국민속촌에서는 찬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하루 종일 SBS 주말드라마 ‘대망’의 촬영이 진행되었다. 김종학-송지나 콤비가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드라마 ‘대망’은 첫 회부터 조인성이 호랑이와 싸우는 무협지 같은 장면으로 화제에 올랐다.

    보통 사극 촬영장은 대규모의 엑스트라들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그러나 ‘대망’의 촬영현장은 예상외로 차분했다. 찬 날씨 때문에 두꺼운 파카로 무장한 스태프들 사이에 연두색 스웨터에 선글라스를 낀 김종학 PD가 조용히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이날의 촬영은 주인공인 박재영(장혁)이 어머니인 단애(조민수)와 처음 상봉하는 장면. 출연진들은 차가워진 날씨에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종학 PD의 카리스마는 과연 듣던 대로 대단했다. 그는 대본을 들고 연기자에게 연기 동선과 시선 처리, 대사까지 직접 연기해가면서 지도했다. 조민수에게 “국화하고 자기가 잘 매치되었으면 좋겠는데…”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차분하고도 강단 있는 말씨가 인상적이지만, 그의 말 한 마디에 시끄럽던 촬영장이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시대 다른 ‘휴먼 멜로 드라마’

    안방극장 ‘사극 인기’ 식을 줄 모르네
    ‘대망’은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존의 사극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극이다. 김PD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존 사극들이 역사라는 틀 안에서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대망’은 상상력을 가지고 역사를 활용하는 드라마”다. 그는 직접 ‘퓨전 사극’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시대 배경이 어느 때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사실 저는 사극이라는 표현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현대와는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한 휴먼 멜로 드라마로 봐주었으면 좋겠어요.”

    주역 여배우들이 입고 나온 의상만 보더라도 ‘대망’이 기존 사극과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진달래색 치마에 녹색 저고리, 그 위에 진노랑의 조끼를 겹쳐 입은 탤런트 윤예리의 모습은 마치 패션쇼에 나온 모델처럼 세련되기 그지없다. 의상부터가 이 드라마가 표방하는 ‘퓨전 사극’답다.

    “사극은 옷 안에 사람이 가두어지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에요. 또 전화나 TV, 자동차 같은 역동적인 수단도 등장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답답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시대를 조선 후기로 가져온 것은 현대를 배경으로 할 경우, 줄거리가 너무 예측 가능해질 것 같아서죠. 상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대극이라면 시청자들이 마치 특정인물을 풍자하거나 비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극은 한결 자유롭죠.” 이미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라는 공전의 성공을 이루어낸 그는 ‘사극’이라는 틀 안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고 있는 듯했다.

    TV 화면 속 사극 열풍이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허준’으로 지펴진 사극 열풍은 ‘태조 왕건’ ‘여인천하’ ‘명성황후’에서 절정에 달했고, ‘제국의 아침’ ‘태양인 이제마’ ‘대망’으로 이어지며 멈추지 않고 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야인시대’까지 이 범주에 넣는다면, 시대극이 단연 현대극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KBS의 ‘장희빈’, MBC의 ‘어사 박문수’ 등이 곧 가세할 예정이라 사극의 기세는 내년에도 여전할 전망이다.

    안방극장 ‘사극 인기’ 식을 줄 모르네

    ‘태조 왕건’ 이후의 시대를 그리고 있는 ‘제국의 아침’. 그러나 ‘태조 왕건’만한 인기는 얻지 못하고 있다.

    여타 장르와 마찬가지로 TV 드라마에도 유행이 있게 마련이다. 이 유행의 주기가 유독 사극에만 머물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사극 자체가 새로운 변신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 영화를 방불케 하는 무술 장면이 등장하는 ‘대망’만 해도 기존 사극과 판이하다. 김종학 PD의 설명처럼, 사극들은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새로운 상상력을 선보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사실 최근의 사극들은 주제 선택과 극을 전개하는 방식 모두가 현대극과 흡사하다. 배경이 현대가 아닌 과거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의사라는 전문직을 다룬 ‘허준’ ‘태양인 이제마’나 상인들의 삶을 그리는 ‘상도’ ‘대망’은 좋은 예다. 궁중 암투와 여성 취향 등,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전개방식을 벗어던지고 과감한 탈바꿈을 거듭하고 있는 최근의 사극들에는 ‘사극’보다 ‘시대극’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을 듯하다.

    여기에 더해 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입지전적 인물들은 현대에서 찾을 수 없는 영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현대극이 특정인물의 성공 스토리를 그릴 경우 시청자들은 주인공에 대한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심을 동시에 느끼게 마련. 하지만 왕건이나 허준 같은 과거 인물들의 성공담을 볼 때는 ‘이건 옛날 이야기니까’라는 심리적 단절감이 분명 존재한다.

    이미연, 강수연, 최수종, 한재석, 조인성 등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배우들이 사극에 대거 출연한 것도 사극의 인기를 높인 이유로 손꼽힌다. ‘여인천하’의 강수연, ‘명성황후’의 이미연은 회당 600만원의 파격적 출연료를 받았다. ‘장희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김혜수는 그 이상의 대우를 약속받았다는 후문이다.

    김기덕 영상역사연구소장은 “모든 장르와 마찬가지로 사극도 유행이 있게 마련인데 요즘은 시대극이 유행인 시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2, 3년간 ‘태조 왕건’ ‘명성황후’ 등 정통 사극이 인기를 끌어왔지만 이제는 특정 주제나 개인을 조명하는 스타일의 시대극이 인기를 얻는 시점이 왔다는 것. 그는 “‘제국의 아침’이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전작인 ‘태조 왕건’과 너무 비슷하다는 이유 외에도 정통 사극의 시대가 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인기 탤런트가 출연한다’라거나 ‘볼거리가 많아졌다’는 것만으로 사극 열풍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왜 사람들은 현재가 아닌 몇 백년 전의 옛날 이야기에 빠져들까. 미디어 비평가 변정수씨는 한국 TV에 본격적인 정치 드라마가 없다는 데서 사극 열풍의 이유를 찾는다. “사극에 대한 욕망의 기저에는 정치 드라마를 보고 싶은 시청자들의 갈망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방송국 역시 현실정치 자체를 그린 드라마는 제작할 수 없으니 사극을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을 찾는 거고요. 제 생각으로는 1985년에 제작된 ‘설중매’를 시작으로 사극의 경향이 바뀌었다고 봅니다. 이후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등에서 사극의 경향은 정치 드라마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사극의 변화는 현실정치의 변화, 그리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민주화 세력들의 성장과도 관계가 있겠죠.”

    안방극장 ‘사극 인기’ 식을 줄 모르네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 드라마 속 이제마의 결혼을 둘러싸고 역사 왜곡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사극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항상 논쟁이 되는 점은 ‘역사 왜곡’에 있다. 사학자들 중에는 역사를 예사로 바꾸는 사극에 대해 극렬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젊은 사학자들은 ‘이제 역사적인 고증 문제는 한물 갔다’는 반응이다. 그 시대의 상식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가공의 인물을 창작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다는 것. 오히려 대중이 사극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사실인 만큼, 사극 제작자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그만큼 사극은 대중이 역사를 접하는 통로이자, 과거를 통해 현재를 다시 볼 수 있는 ‘가상현실’인 셈이다.

    김기봉 교수(경기대 사학과)는 “사극이 인기를 누리는 것은 현대가 포스트모던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색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사극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의 교훈과 극적 재미를 함께 주는 장르입니다. 현실이 불안하거나 불만스러울 때, 사람들은 과거에서 교훈이나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으려 하죠. 이 같은 사람들의 심리를 사극이 잘 짚어낸 것이죠. 현재의 사건을 과거 시점으로 가져가 새롭게 포장한 사극을 보며 사람들은 심리적 카타르시스와 통쾌함을 느낍니다. ‘여인천하’ 같은 경우, 판에 박힌 여성들의 암투를 그린 듯하지만 정치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숨겨진 욕구가 이처럼 잘 반영된 드라마도 드뭅니다.”

    흔히 사극을 비판할 때 ‘낡아빠졌다’라거나 ‘구닥다리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사극이야말로 현재의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한 장르다. 성공한 사극들은 한결같이 경제불안이나 의약분업, 부패한 정치 상황, 여권신장 등 현실의 코드를 교묘하고도 적절하게 다루고 있다. 역사는 항상 순환하게 마련이다. 과거 속에서 되풀이되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은 문제의 해법을 찾기도 하고 해결되지 않는 불만을 대신 풀어버리기도 한다. 이 같은 대중의 열망을 제대로 짚어낸 사극, ‘현대적’인 사극만이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극 열풍이 더욱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사극의 높은 인기는 그만큼 우리의 현실에 문제가 많다는 뜻이 아닌가. 사극을 보며 불만을 해소한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의 어느 즈음이 아니라 바로 21세기 현대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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