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9

2002.06.20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거대한 ‘일체감의 블랙홀’

기자들 관전기, 화장실서 일보면서도 ‘대한민국’ 외쳐

  •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10-13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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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거대한 ‘일체감의 블랙홀’
    6월10일 오후 5시경 대구월드컵경기장은 갑자기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미국에 선제골을 내준 뒤 탄식의 소리가 커져갈 무렵 ‘꽃미남’ 안정환이 절묘한 헤딩슛으로 상대편 골 네트를 갈랐을 때였다. 북소리 둥둥, 커지는 함성소리, 일렁이는 붉은 물결…. 한국민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신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열광의 한가운데서 다시 그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기쁨에 몸을 떨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뒷덜미를 꽉 틀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

    그것의 시작은 6월4일 부산에서 치러진 한국-폴란드전이었다. 역사적인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쁨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컸다. 그 기쁨은 기상 악화로 1시간30분이나 늦은 오후 6시40분에야 부산 김해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지하철 공사와 러시아워로 인한 시내의 극심한 교통체증에 시달릴 때도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시내버스 안에서 바라본 부산시내 전경은 의외로 조용했다. 거리에는 바람 한점 불지 않았다. 후텁지근한 날씨. 부산은 태풍의 핵처럼 그렇게 조용히 밤의 축제를 예비하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약 1km 떨어진 대로에서 내려 걸어갈 때서야 비로소 사방은 붉은색 물결로 일렁거렸다. 거리는 온통 붉은 상의, 붉은 모자, 붉은 머플러 투성이였다. 붉은 유니폼으로 단장한 선남선녀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끝을 알 수 없는 행렬에 파묻혀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연제구 거제동)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 건물이 마치 스펀지처럼 기자 일행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한 내용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미래의 어느 도시에서 독재자가 사이렌을 울리면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집단 최면에 걸려 거대한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내는 이 축구의 힘이 만약 잘못 쓰인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히틀러를 비롯한 독재자들은 스포츠를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온갖 미디어와 권력은 1년 전부터 월드컵 16강 진출의 꿈을 반복해서 암시해 왔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거대한 ‘일체감의 블랙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일단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90분간의 축제 속에 파묻히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가게에서 오징어 한 마리, 빵과 캔맥주를 두 개씩 샀다. 캔맥주는 경기장에 들고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 앞에서 마시면서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타는 목을 축였다.

    밤 8시, 지정된 자리에 앉자 경기장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관중석 한쪽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폴란드팀 응원단을 빼고는 누가 ‘붉은 악마’ 응원단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붉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이런 일체감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에 흰 옷을 입고 있던 기자 일행은 이미 밖에서 붉은 모자를 샀다. 이것이었을까, 뒷덜미를 낚아채던 그 황당한 느낌은. 함께 동화되지 않을 거면 아예 경기장에 들어오지 말라는, 한국팀이 아니라 폴란드팀을 응원하면 붉은 옷을 입은 우리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

    ‘붉은 악마’ 응원단은 골대 뒤쪽, 사각지대여서 입장료가 가장 싼 N구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우리 팀이 등지고 있을 때는 거대한 힘이 되지만 상대편이 등질 때는 특히 골키퍼에게 살인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고 한다.

    높은 관람석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니 선수들의 시스템이나 전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3-5-2에서 4-4-2로 바뀌고 다시 흩어지고 모였다. 어쩌면 축구는 생태적인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22명의 선수들이 각기 임무를 다하며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오~ 필승 코리아….’

    ‘붉은 악마’의 조직적인 응원에 맞춰 관람석이 요동친다. 전반 초반 한국팀은 결정적인 위기를 두어 차례 맞이했다. 그럼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단련된 선수들인 데다 일방적인 응원에 힘입은 것이었을까.

    응원의 광기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전반 26분 황선홍의 슛이 네트를 갈랐다. 경기장을 쩡 하고 울리는 함성이 일었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저절로 벌떡 일어났다. 신들린 무당이 춤추듯 손을 휘저으며 바닥을 구르고 뛰었다. 갑자기 머리에 쥐가 났다. 심장이 멎고 얼굴이 선홍색으로 변했으며 귀가 먹먹해졌다. 시간이 멈췄다. 이 짧은 한순간을 우리 국민은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모두 붉은빛으로 하나가 됐다.

    건물 안에 있어도 경기 장면을 볼 수 없던, 복도의 안전요원들이 함성소리가 일 때마다 들뜬 표정으로 운동장이 보이는 곳으로 내달았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하프타임 때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어떤 관람객은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면서도 “대~한민국”을 외쳤다. 웃느라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후반 8분 유상철 선수가 수비수를 제치고 ‘캐넌슛’을 날렸다. 다시 엄청난 함성이 일었다. 옆사람과 함께 어깨를 겯고 날뛰었다. 이제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으로 기울었다. 후반 44분 히딩크 감독이 전광판의 시침을 슬쩍 바라보았다. 선수들도 관중들도 시계로 눈을 돌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이겼다… 이겼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합창했다.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관중들의 표정에는 만족감이 넘쳐흘렀다.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 응원소리는 거리로 흘러나와 버스에 오르고, 다시 지하철까지 이어졌다.

    밤 11시30분 바다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부산역 광장. 붉은빛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광장의 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 응원하던 1만여명의 군중은 서서히 흩어졌지만 미련이 남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응원구호를 외쳤다. 지나가던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대~한민국’ 박자에 맞춰 경적을 울려댔다. 웃통을 벗어제친 열혈남아들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창문을 내리고 밖으로 태극기를 흔들었다. 벽안의 외국인들도 어깨를 흔들고 박수를 치며 흥겨워했다.

    밤 0시15분 부산발 서울행 임시열차. 30여대의 차량을 연결한 새마을호는 바깥 분위기와는 너무 대조적으로 조용했다. 스스로 열기를 식히지 못한 사람들이 식당칸에 모여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개중에는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 부인을 데리고 월드컵경기장을 찾아다니는 50대 후반의 축구팬도 있었다. 축구는 해체 위기에 몰린 현대의 가족을 하나로 묶어두고 있었다.

    이른 새벽, 사우나에서 꿈을 꿨다. 다시 붉은빛의 경기장. 전날 본 경기의 잔영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다 선잠을 깼다. 텔레비전 아침 뉴스는 꿈속의 장면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다시 그 앞으로 다가가 열광의 기억을 되새겼다.

    며칠 뒤 열기가 식은 후에야 비로소 정체를 알 수 없던 그 느낌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자청한 구경길에 어울리지 않게 강제당하는 느낌, 그것은 바로 승리의 열광에 사로잡힌 집단 최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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