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6

2001.03.22

발음은 키신저만큼만 해라

  • 입력2005-02-18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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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음은 키신저만큼만 해라
    우리나라에 퍼져 있는 영어 미신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발음에 관한 것이다. “미국인과 똑같이 발음하지 않으면 말이 안 통한다” “미국인과 똑같이 발음할 수 있어야 청취도 된다” “연음법을 알아야 회화가 된다” “사전에 나온 발음들은 엉터리다. 예를 들어서 ‘milk’를 사전에 나온 대로 ‘밀크’라고 하면 안 되고, ‘미역’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등등.

    이런 종류의 미신들은 수없이 많다. 심지어는 영어선생님들 중에도 이런 미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순진한 학생들을 겁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미국인과 똑같이 발음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하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두 가지다. 첫째, 사춘기 이후에 영어를 배운 사람이 원어민과 똑같이 발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영어를 배우는 것이라면 그렇게 똑같이 하지 않아도 된다.

    우선 첫번째 대답인 ‘거의 불가능하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보자. ‘언어습득의 결정적 시기론’을 주장하는 신경생리학자들에 의하면, 두뇌의 유연성이 있는 사춘기(10~12세)이전까지는 외국어의 발음을 그대로 뇌에 흡수할 수 있지만, 대뇌의 기능분화가 시작되는 사춘기 이후에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사춘기 이전에 이민이나 유학을 갔던 사람 중에는 미국인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발음을 잘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이후에 갔던 사람들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발음만큼은 어딘지 한국인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물론 개중에는 거의 똑같이 하는 특수한 사람들이 간혹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미국인과 똑같이 발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노력과 시간을 좀더 생산적인 것에 투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똑같이 발음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번째 대답,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알기 쉽게 예를 하나 들어보면, 미국의 국무장관으로 세계 외교무대를 주름잡았던 헨리 키신저는 15세에 이민 와서 50세가 넘도록 독일식 발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보고 영어를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훌륭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칭송을 받았다. 발음은 미국태생과 똑같지 않았어도, 완벽한 문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장만 정확하다면, 발음은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정도의 ‘오차범위’ 안에만 들어가면 된다. 우리말의 발음이 출신지역에 따라 제각각 다른 것처럼, 영어 발음도 국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도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므로 발음이 미국인과 똑같이 안 된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또 똑같이 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오차 범위 안에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오차 범위 내의 발음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배워야 할까. 다음 호에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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