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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민족혼’ 심는 재일동포 큰어른

한국학원 정환기 이사장… 대 이은 ‘조국사랑’만큼은 아직도 청춘

  •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

‘민족혼’ 심는 재일동포 큰어른

‘민족혼’ 심는 재일동포 큰어른
”낯선 타국 땅,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조센징’ 소리를 들어가며 공사판을 전전하시던 아버지와 그 처지와 신세가 비슷했던 가난하고도 남루한 차림의 ‘조센징’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랐습니다.”

3세 때 부모를 따라 일본(나고야)으로 건너가 가난과 차별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선 정환기씨(77). 정씨는 현재 일본 호박그룹 회장, 아이치 상은(商銀)의 이사장을 맡고 있고 그가 세운 민족학교 ‘한국학원’은 제일교포 3세들에게 ‘대한민국’을 가르치고 있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정환기’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재일교포 1세대의 거목으로 존경과 명성을 얻고 있다.

정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묶고 있는 서울의 한 호텔을 찾았다. 호텔 입구까지 나와 기자를 기다리는 정씨의 모습은 칠순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쳐 보였다. 그는 눈을 지긋이 감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동년배 재일동포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나날이었다.

“체조시간이 제일 싫었어. 웃옷을 벗고 운동을 해야 하는데 떨어진 싸구려 메리야스로 일본인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결심했지. 큰돈을 벌어 일본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정씨가 소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절에서 한글학관이 열렸고 정씨 부모는 그를 그 학관에 보내 한글을 배우게 했다. “어느 날 일본 경찰관이 들이닥쳐 선생님을 발길로 차기 시작하는 거야. 훌륭한 국어(일본어)가 있는데 무슨 지방어 교육을 하냐면서 선생님과 우리를 내쫓는데… 어린 마음이지만 반발심이 솟구치더라고. 대체 우리 조선인 동포는 일본인에 비해 어디가 못한가 하고 생각하게 됐지.”

‘민족혼’ 심는 재일동포 큰어른
비록 세살 때 일본에 건너가 일본 체류 기간만 70여 년이 넘었지만, 그는 자신의 뿌리가 한국임을 강조하는 데 늘 인색치 않았다. 서투른 한국어를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그의 ‘조국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부친 역시 ‘조국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부친은 일본에서 저임금의 익숙지 못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번 돈의 일부를 모아 고향(경상남도 진양군 사봉면) 땅을 조금씩 되샀다. 광복 후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초등학교에 책상과 의자를 기증하고 마을에 전등을 다는 일에 손수 나섰다. 정씨의 ‘조국 사랑’은 부친에게 이어받은 고귀한 산물인 셈이다.

그가 조국을 처음으로 찾은 것은 17세 때인 1940년 겨울. 그는 조선행 배를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승선장에 도착하니 일본인과 조선인이 따로 열을 짓도록 돼 있었다. 조선인들은 엄격한 절차를 밟아야만 배에 오를 수 있었던 것. 현해탄을 건너 부산항에 닿은 것은 밤 11시 경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 오르면서 정씨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기차에 ‘하행’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 ‘이런 어리석은 일이. 고국의 수도로 가는 열차가 하행이라니….’ 정씨는 기가 막혔다.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울컥거림에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정씨는 일본 나고야의 고다마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 통신회사에 들어갔다. 입사시험을 본 20명 중 그와 일본인 한 명만이 채용되는 행운을 안게 됐지만 한 달 65엔의 급여로는 그의 큰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두번째로 취직한 하청공장에선 주인에게 인정받아 사무직으로 승진하게 된다. 당시 주인은 자신의 딸과 장래를 맺게 해 사업을 물려주겠다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그는 상대가 일본인이라는 것에 일종의 거부감을 느꼈고 물론 상대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도 느끼지 않아 이를 거절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1941년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자 집에서 혼사를 서두르는 바람에 그는 같은 재일동포로서 건어물 가게를 하는 집의 딸과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했다. 연합군 공습이 심해지자 도요하시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의 장사 수완이 발휘된다. “막상 전쟁 와중에 팔 만한 물건이 없었어. 가까운 아쓰미 반도, 지다 반도는 물론이고 인근 항구에까지 가서 미역, 까나리, 멸치, 새우젓 등의 건어물 일체를 사 그 물건들을 군수 관련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급식부에 납품했어.” 정씨는 군수공장에 급식을 한다는 이유로 군에 징집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인 성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재일 한국인들의 권익이 향상되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성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래서 참여하게 된 것이 민단결성 사업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사상과 신조를 초월한 재일동포들의 총 결집체인 재일조선연맹(조련)이 결성됐다. 그러나 정씨의 눈에 조련은 지나치게 좌경화돼 있었다.

“조련을 탈퇴한 동포들이 각지에서 민단 결성에 박차를 가했어. 조련의 조직적인 방해도 있었지만 결국 민단 결성 사업은 성공했지.” 아이치에 민단을 결성했을 때 느낀 감격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민단 활동을 해 나가던 정씨는 한국인들이 자본이 부족해 사업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본이라는 차별이 심한 땅에서 일본 금융기관이 외국인들에게 호락호락 자금을 대줄 리 없었던 것.

정씨는 동포들의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선 ‘민족금융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재일동포들과 뜻을 모아 1954년 ‘금강신용조합’이란 이름으로 금융기관을 설립한다. 처음엔 출자금 530만엔으로 시작했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아이치 상은이라는 거대한 금융기관으로 발전했다. 그는 재일동포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잠 못 이룬 적이 많았다. “50년, 100년이 지나면 민족혼을 가진 자가 몇 명이나 남을 것인가.”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민족혼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를 짓눌렀던 것. 주변에서 마주치는 제일동포 2, 3세들은 모국어를 모르고 민족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이해도 없었다. 이래서야 민족혼이 희박해질 것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정씨는 이에 대한 심각함을 인식하고 교포 1세대들과 함께 ‘한국학원’을 건설하는 데 주력한다. 그는 1965년 학원 창립 이래 아이치 한국학원의 이사장직을 계속 맡고 있다.

정씨는 최근 민단조직의 후계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민단활동 활성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광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조국 건설을 위해, 혹은 동포들과 조직을 위해 정열과 땀, 희생을 바쳤던 1세들을 대신할 젊은이들에게 그는 주장한다. “과거를 안다는 것은 결코 쓸모없는 짓이 아니며 미래를 향한 커다란 자극이 되기도 하는 가장 좋은 참고서다.” 그는 민단조직을 ‘들어오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운’ 매력 있는 조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자각하면서 젊은이들이 민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산하단체 조직의 일원이 되도록 힘쓰고 있다.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그의 식견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보다 더 해박하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에 대한 견해부터, 지방자치, 세계화, 한국의 민족주의, 통일에 대한 전망까지 그는 전문가 뺨치는 식견을 가지고 있다. 글솜씨 또한 탁월해 월간지 ‘프리라이프’와 민단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고정칼럼을 연재했고 ‘일본을 산다’ ‘내 사랑 대한민국’ 등의 칼럼집도 냈다.

취재를 마치며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철이 들면서 나라 잃은 슬픔과 전쟁의 무서움을 겪었습니다. 헐벗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제법 많은 돈을 벌었고 동포사회의 권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소망은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주간동아 2001.03.22 276호 (p74~75)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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