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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망측’은 인터넷을 떠나라

  • < 민경배 · 사이버문화연구소 소장 >

‘엽기 망측’은 인터넷을 떠나라

‘엽기 망측’은 인터넷을 떠나라
지난 한해 동안 인터넷을 통해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단어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엽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엽기의 열풍은 대단했다. 아직도 인터넷 인기 검색어 상위 랭킹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도 ‘엽기’라는 단어는 약방의 감초처럼 시도 때도 없이 갖다 붙이는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필자 역시 지난 한해 동안 엽기를 주제로 한 원고 청탁을 요청받거나 인터뷰, 방송 출연 등에 정신없이 불려 다니곤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엽기 문화 속에는, 톡톡 튀는 유쾌한 파격은 물론이요 공포스럽고 끔찍한 엽기물조차도 갑갑한 일상과 규범화된 사회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하위문화로서의 건강한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엽기는 자살 사이트, 폭탄 사이트 등 인터넷을 매개로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사회 문제와 맞물리면서 반규범적이고 반사회적인 변종 문화로 여론의 질타를 받는 군색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엽기 발랄한 건강함은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사회질서와 시민의 안녕을 위협하는 흉기로서의 엽기만이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위험한 인터넷을 그냥 방치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논리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제 음란물로 대표되는 ‘유해한 인터넷론’에 더하여 엽기물로 대표되는 ‘위험한 인터넷론’까지 등장한 것이다. 엽기가 인터넷 규제를 위한 새로운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엽기 발랄’ 건강함 포기 말아야

‘엽기 망측’은 인터넷을 떠나라
‘위험한 인터넷론’은 확실히 ‘유해한 인터넷론’보다 훨씬 더 많은 대중적 공감을 얻어낸다. 음란물이 단지 규범의 문제였다면 위험은 바로 생존 그 자체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 성인 방송국 단속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나 성담론 개방 등의 이유를 들어 비판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자살 사이트나 폭탄 사이트의 강제 폐쇄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대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위험사회’라는 저서에서 말했던 현대인들의 위험에 대한 공포가 그대로 들어맞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터넷이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별개의 공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세계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자살 사이트를 기웃거리던 어린 학생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해도 그것을 자살 사이트가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단세포적인 사고가 아닐까. 그 아이들을 자살로 몰고 간 사회적 원인에 대해서, 즉 그것이 가정 불화였는지, 성적 압박이었는지, 아니면 집단 따돌림으로 인한 고통이었는지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은 순서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자살 사이트를 폐쇄하는 것이 청소년들의 자살을 막는 해법이라는 발상이야말로 어느 무엇보다 엽기적이지 않은가. 문제의 근원은 인터넷이 아니라 항상 현실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물론 위험천만한 엽기물들을 마냥 방치해 둘 수만은 없는 일이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엽기 문화 속에 잠재되어 있던 건강함마저 함께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반규범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의 엽기 문화에는 ‘엽기 망측’이란 신조어를 붙여 줌으로써 ‘엽기 발랄’한 문화와 분명하게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사실 그동안 ‘엽기’라는 단어는 지나칠 정도로 남발되면서, 그 안에 너무나 많은 이질적 속성들을 뭉뚱그려 담고 있었다. 이제 엽기가 짊어진 버거운 짐을 ‘엽기 발랄’과 ‘엽기 망측’에 나누어 덜어주자. 그리고 ‘엽기 발랄’한 건강성을 한껏 만끽하는 한편 ‘엽기 망측’한 것들에는 우리의 삶을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경계의 눈초리를 멈추지 말자.





주간동아 2001.03.22 276호 (p72~72)

< 민경배 · 사이버문화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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