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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인물 표현하는 게 좋아”

‘그녀에게…’ 여주인공 김태연… “이젠 연기에 책임질 때”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망가진 인물 표현하는 게 좋아”

“망가진 인물 표현하는 게 좋아”
사랑은 달콤하지 않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정열을 운명으로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과 상대의 삶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고 나서야 스스로 사그라든다. 그런 이들에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절망, 혹은 비극이다.

우리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이런 인물들을 만나왔다. 세상 그 어떤 자극보다 독하고 강렬한 사랑에 몰두하면서 스스로 자폭해가는 사랑의 주인공으로 많은 사람들이 ‘베티 블루 37.2。’의 베아트리체 달을 떠올릴 것이다. 육감적인 입술과 도발적인 눈빛으로 환호하고 절규하던 그녀의 모습은 나신의 과격한 곡선만큼이나 참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으니까.

3월17일 개봉하는 우리 영화 ‘그녀에게 잠들다’는 많은 부분에서 ‘베티 블루’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을 피해 바닷가 마을의 폐선에서 혼자 살아가던 남자의 일상에 찾아든 여자. 육체적으로 시작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집착과 연민으로 발전하고, 남자와 오래도록 함께하기 위해 아이를 원하던 여자는 상상임신 끝에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킨다. 결국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는 끔찍한 자해소동 끝에 두 사람의 ‘치명적’ 사랑은 파국을 맞는다.

“망가진 인물 표현하는 게 좋아”
비슷한 설정이지만, 이 영화가 ‘베티 블루’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여주인공 ‘수빈’역의 김태연(25) 때문이다. 베아트리체 달이 ‘펄펄 날뛰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면, 김태연의 가녀린 어깨와 앙상한 몸매는 어딘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거친 욕설을 내뱉고, 칼로 자신의 손을 찌르는 파괴적인 행동을 할 때도 그녀에게는 광기나 격정보다는 우울과 상처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곧잘 등장하는 두 사람의 섹스신 또한 그리 과격하거나 에로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두 사람의 감정, 여자의 앙상한 가슴이 남자에겐 편안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는 아스라한 느낌이 전해질 뿐이다.



“치열하고 정열적인 사랑에 섹스가 빠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언론에서 ‘이번 영화에선 김태연이 얼마나 벗었나’ 하는 쪽으로 관심을 보이는 건 정말 맘에 안 들어요. 이 영화는 멜로물이지, 에로영화가 아니에요.”

첫 영화 ‘거짓말’의 호된 경험은 배우로서의 그녀를 단련시켰지만, 한편으론 예민하게도 만들었다. ‘거짓말’ 이후 쏟아지는 영화 출연 제의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벼르고 별러서” 출연하게 된 두번째 영화가 바로 ‘그녀에게…’다. “작품의 강렬함이 맘에 들어서”라지만 역시 노출이 많은 영화인지라 그녀의 선택에 궁금함이 일었다.

“참 이상해요. 맑고 예쁘기만 한 캐릭터에는 마음이 안 끌려요. 제가 그런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우울하거나 망가진 인물을 표현하는 게 좋아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게 재밌어요.”

첫 영화부터 주연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주인공이 중심이 되어 끌어가야 하는 작품인 만큼 아직 새내기 배우인 그로선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영화는 중간에 제작사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김태연은 촬영 초반에 배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찍다 온몸에 화상을 입어 두 달간이나 병원 신세를 지는 혹독한 경험을 했다.

“팔과 등에 2도 화상을 입었어요. 눈썹이랑 얼굴 솜털까지 다 탔는데, 당시에는 배우로서뿐 아니라 여자로서도 끝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서웠어요. 지금도 불에 타는 꿈을 자주 꿔요. 깨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어요.”

덧니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말은 하지만,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싶다. “이건 패션쇼하다 다친 거고, 이건 화상 흉터고, 여긴 넘어져서 그래요.”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가는 다리가 온통 상처 투성이다. 사람들은 영화 한 편으로 쉽게 스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었다.

“연기를 하다 보면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고 놀라게 되는 때가 있어요. 정말 짜릿한 순간이죠. 배우는 그래서 매력적인 직업 같아요.”

아직 개봉 전이지만, 벌써 수십 번 자신의 영화를 봤다는 김태연. “볼 때마다 잘 못한 것만 보여서 정말 속상해요.” 영화 걱정에 잠을 잘 못 자서 아침이면 눈이 퉁퉁 부어 있다는 김태연은 카메라 앞에서 눈에 잔뜩 힘을 준다.

“춤이라도 좀 춰봐요.” 이제 영화 카메라가 더 익숙해서일까, 전직 모델답지 않게 카메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김태연은 “저 춤 잘 못 춰요. 영화에서 보셨잖아요. 제가 봐도 영 어색해요”라고 말한다.

“망가진 인물 표현하는 게 좋아”
워낙 파격적인 역만 맡아서 실제의 김태연도 거침없고 일탈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녀는 예상 외로 차분하고 진지했다. 조용하고 느린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정리해 말하는 그녀에게선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고등학생인 줄 알아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김태연. 이 역시 ‘거짓말’의 ‘와이’가 만들어준 그녀의 이미지다. 그녀에게 있어 ‘거짓말’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마치 꿈을 꾼 것 같아요. 다시 해보라면 절대 못할 걸요. 날 배우로 만들어줬고, 세상을 알게 해준 작품이에요.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철모르는 어린애처럼 그냥 놀았던 것 같아요. 이젠 연기가 무서워요. 나 자신에게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평범한 소녀. 스튜어디스가 되기 위해 인하공전 항공운항과에 들어갔던 김태연은 우연히 의상학과 졸업작품전 무대에 섰다 모델 활동을 시작했고, 또 우연히 인생이 바뀌어 영화배우가 되었다. 영화 덕분에 화제의 인물이 되어 세상에 얼굴을 알렸으니, 더 큰 꿈과 욕심을 가져볼 만하지만 그녀의 말은 의외다.

“할 수 있는 거만 할래요. 그렇게 부지런한 성격도 아니고, 꽉 짜인 스케줄로 스스로를 구속하면서 다그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일과 모델일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긴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느긋하게 오가는 그녀의 모습은 바쁜 인터뷰 스케줄 속에서도 자유로워 보였다.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서, 평범하지만 특별한 배우 ‘김태연’을 읽을 수 있었다.



주간동아 2001.03.22 276호 (p64~65)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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