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9

2001.01.25

핑크빛으로 물든 꼬마들 채팅방

채팅과 게시판에 낯뜨거운 음란대화 홍수… ‘아무나’ 접속 통제 무방비

  • 입력2005-03-11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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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빛으로 물든 꼬마들 채팅방
    섹남, ××큰년, 섹쉬공주…. 성인용 도색사이트의 아이디(ID)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어린이 전용 채팅사이트라고 홍보하고 있는 L사의 채팅방에 지난 1월 초 저녁 기자가 들어가 확인한 대화자 이름이다. ‘나랑 만나서 섹할 여자’ ‘뭘 빨아?’ ‘×깐뇬만 모여라’…. 차마 말로 하기 어려운 이름의 채팅방들이 색색고운 디자인과 귀여운 캐릭터들로 포장된 어린이 전용 사이트에 넘쳐나고 있었다.

    ‘아이들만의 안전 놀이공간’임을 자처하는 어린이 채팅 사이트들이 성인용을 방불케 하는 음란정보와 도색물로 얼룩지고 있다. 채팅방뿐 아니라 게시판에 올려진 글 역시 심각성이 못지않다. 회원 12만명을 자랑하는 S사의 사이트. 만 6세부터 14세까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스턴트 메시징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이 사이트 게시판에 접속해 보았다.

    “우리 오늘밤 침대 위에서 니가 아르켜 준거 하자. 난 너무 기뻐. 오늘 뜨거운 밤 보내자… 분위기에 맞은 노래를 라디오에 틀고 그 노래는 섹스섹스~~섹스섹스~~이런 노래” “내가 빨개벗고 일어나 있으니까 나의 ××를 게속 뚤어지게 보고 있었다. 구러더니 침대에 높이 다리를 벌리게 하구 나의 ××를….”

    대화자 이름 섹남, ××큰년…

    핑크빛으로 물든 꼬마들 채팅방
    이 밖에도 아동 전문 사이트인지 성인용 사이트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내용이 즐비했다. 지난해부터 앞다퉈 개설되고 있는 어린이 전용 사이트 중 게시판이나 채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곳은 이 외에도 G사, I사 등 모두 10여개. 시간과 사이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심한 경우 접속자 300여명 가운데 40명 이상이 음란성이 농후한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는 일도 있었다.



    이들 사이트는 모두 야후 등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어린이’나 ‘채팅’을 검색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게시물이나 채팅 내용이 모두 아이들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일부는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하는’ 어린이들이 올린 글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연세대학교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실제 경험담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이 쓴 도색물을 보고 상상해내 이를 여러 사람에게 과시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인들이 아동 사이트에 들어와 이런 음란 내용을 싣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이트가 별도의 실명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있어 익명의 어른들도 어렵지 않게 사이트에 접속해 아이들로 가장해 채팅할 수 있는 것.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4학년 이모양은 지난주 N사의 어린이용 검색엔진에서 한 채팅 사이트를 찾아냈다.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겠다는 기대로 접속한 이양은 계속해서 음란한 말을 두드려대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애를 먹었다.

    “‘초딩(초등학생)만 들어오세요’라고 되어 있는 채팅방에도, 들어가 보면 처음에는 괜찮다가 자꾸 이상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럴 땐 그냥 나와 버리기 일쑤예요.”

    외국의 경우 실제로 아동용 채팅방이 유괴나 아동 성폭행 등의 범죄에 악용된 사례가 있다. 친구로 가장해 불러내거나 범죄 대상을 물색해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데 이용된 것.

    “사이트에 오기가 싫어지지만 달리 갈 데가 없잖아요.” 채팅중에 만난 수원 S초등학교 6학년 유모군의 말이다. 유군은 기자가 신분을 밝히자 또 다른 ‘변태’(유군 본인의 표현)로 의심해 설득에 한참 애를 먹어야만 했다.

    이처럼 아동 전문 사이트들이 음란성 내용으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는데도 사이트 운영업체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루 24시간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과 채팅 내용을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그 많은 내용을 모두 확인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불건전한 게시물들을 삭제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L사 간부의 말이지만, 어쩐지 손을 놓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현행법상 14세 미만의 어린이가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작성할 때는 부모의 동의를 거치게 돼 있다. 아동의 신상 정보가 마구 운영업체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동시에 어른이 아이를 가장해 유해정보를 퍼뜨리거나 범죄에 이용하는 것을 막는 장치인 셈. 그러나 많은 업체들이 부모가 실제로 동의했는지 확인하는 전화나 우편 등의 절차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아예 회원가입 절차를 생략해 말 그대로 ‘아무나’ 접속할 수 있도록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당국의 관리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홍순철 유해정보팀장은 “어린이 전용 사이트라고 해서 특별한 감독을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정도가 심할 경우 게시판 폐쇄 등을 명할 수는 있지만 법 규정상 성인용 사이트와 다른 기준을 적용해 등록하거나 관리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이쯤 되면 정부 당국이 어린이들을 ‘음란의 바다’로 내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내 아이가 ‘www.sex…. com’ 따위의 사이트에 드나들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안심하고 있을 일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한마디로 인터넷에 안전지대는 없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인터넷 사용을 금지해 아이를 ‘넷맹’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 ‘내 아이’를 음란정보로부터 보호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섣불리 혼내지 말라고 충고한다. “음란물을 접한 아이가 가장 상처받는 것은 부모가 자신을 ‘나쁜 아이’로 규정할 때다. 오히려 인터넷 상의 음란물들이 ‘사실과는 다른 꾸며낸 것’임을 주지하도록 해 현실과의 충돌을 막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방안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21세기의 부모는 20세기의 부모보다 자녀 관리를 위해 더욱 많은 일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동 사이트에 대한 성인들의 접촉을 철저히 근절하는 등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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