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9

2001.01.25

'노근리 배상' 법정싸움은 이제부터

명백한 전쟁 범죄‥전쟁에 관한 국제법 직접 적용해 美법원에 소송해볼 만

  • 입력2005-03-11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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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 배상' 법정싸움은 이제부터
    마침내 노근리 사건의 한미 공동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요지는 “철수중이던 미군에 의해 피난민 다수가 사살되거나 부상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발표로 이 사건의 제1라운드는 끝났다. 피해자들은 이 사건이 ‘전쟁범죄’로 규정되어 미국 정부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일단 요원한 일이 되었다. 피해자들이 이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누가 보더라도 이 사건은 전쟁범죄로 규정되어 그에 따른 응분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로서는 당연히 제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한미 양국 정부가 향후 이 사건을 전쟁범죄로 규정하여 응분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일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법률적 투쟁뿐이다. 한미 양국의 공동조사결과가 국제적이든 국내적이든 사법기관의 판단까지 기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헤이그 육전조약 3조 확실한 근거

    필자는 이 사건이 국제법상 전쟁범죄가 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노근리 사건은 ‘전쟁중에 전투요원이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은 민간인에 대해 학살행위를 한 것’으로 각종 국제전쟁 법규와 국제관습법에 의해 전쟁범죄로 규정되기에 충분하다. 노근리 사건의 이런 법적 성격은 이 사건이 어느 법정에서 재판된다 해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이 전쟁범죄로 귀착된다 해도 피해자들이 반드시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건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근리 사건이 전쟁범죄를 구성한다고 할 때, 국제법상 피해자 개인이 가해국 정부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1907년 헤이그 육전조약3조이다. 이 규정은 전쟁과정상 군대에 의한 국제법 위반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 가해국의 국가책임을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규정은 전쟁범죄로 인해 피해를 본 개인이 직접 가해국을 상대로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것이라고 다수의 국제법 학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노근리 배상' 법정싸움은 이제부터
    문제는 가해국가에 대한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어떤 방법으로 행사하는지다. 국제법적으로 말한다면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국제사법기구를 통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현재의 국제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국제법정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제소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몇 번의 임시형사재판소(제2차 세계대전 뒤의 뉘른버그·도쿄군사재판소, 최근의 유고슬라비아·르완다재판소)가 있었고, 현재 국제상설형사재판소의 설립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어느 법정도 노근리 사건을 취급할 가능성은 없다.

    두번째 방법은 국제적인 배상청구권을 국내의 사법제도를 통해서 행사하는 것이다. 현재의 국제적 상황이 국제법정을 이용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사법적 구제 방법은 오로지 국내법정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미국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그 경우 주권면제주장에 속수무책일 것이고 설사 승소한다 해도 그 판결을 집행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이 사법구제를 바란다면 미국의 법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국은 전쟁범죄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해 피해자 개인이 미국 국내법원에서 가해국을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나라다. 이런 예를 본다면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들이 일종의 희망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가해국이 미국정부가 되었을 경우 이러한 희망은 대개 절망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국내법에 의해 미국이 전쟁범죄의 가해자가 되었을 때에는 그 책임을 완벽하게 피해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의 가장 강력한 피난처는 연방불법행위법(FTCA) 상의 면책조항이다. 이 법에서는 전쟁시의 전투행위와 외국에서의 불법행위에 대해 미국정부의 면책을 규정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이 미국법정에서 심리될 때, 전쟁범죄라는 장애물을 넘는다고 하더라도 이 면책 조항은 미국정부의 강력한 방어수단이 될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켈리 소대장이 밀라이 마을에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은 미국법정에서조차 전쟁범죄로 규정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민사배상사건으로 발전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바로 이 규정의 영향력 때문이다.

    '노근리 배상' 법정싸움은 이제부터
    다음으로 외국인청구법(FCA)이라는 법률에 의해 미군이 외국에서 공무수행 과정 중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 미 국방성은 최고 10만달러까지 배상할 수 있으나 그 액수가 적은 것은 고사하고 전투행위에서 일어나는 피해배상이나 적성국민에 의한 청구는 아예 이를 배제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이 법정에서 문제될 때 미국은 이의 적용을 들고나올 가능성도 있다.

    시효문제도 걸림돌이다. 민사사건에서 미국의 시효제도는 대단히 엄격하다. 연방정부를 상대로 하는 어떠한 민사소송도 권리 발생일로부터 6년 이내에 제기하지 않으면 시효에 걸리고, 불법행위의 경우는 2년 이내에 합당한 정부기관에 서면으로 청구하지 않거나 정부기관으로부터 최종기각을 받은 뒤 6개월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시효로 소멸된다.

    그러므로 미국 내에서의 소송은 미국 국내법의 제한으로 사실상 그 승소 가능성이 대단히 낮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가해자 개인을 상대로 하는 전쟁범죄의 추급은 그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미국 형법상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할 수 있고 이 경우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형법의 명문규정이기 때문에 가해자는 자기가 사망할 때까지는 이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일반적인 미국 내에서의 소송 성공 가능성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지만 이것과 관계없이 시도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미 국내법의 제한과 관계없이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직접 적용하여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국제관습법이나 국제법을 미국 국내법으로 인정하는 수많은 판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미국 국내법이 전쟁범죄의 피해자 구제를 여러 가지로 제한하고 있다고 해도 국제법을 직접 적용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미국에서 노근리 사건을 법정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변호사들의 주된 법적 논거는 향후 이것이 되지 않을까 전망한다. 다만 그것이 법원의 지지를 받을는지는 현 단계에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가능성은 미국에서의 특별법 제정이다. 미국 국내법의 제한은 노근리 사건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것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미국정부의 특별법 제정이다. 미국은 이미 유사한 사건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타국 국민에게 피해를 배상한 바 있다. 1차대전시 프랑스에서의 미군 범죄행위에 대하여 ‘1918년 4월18일 법률’로 3만8000건이 넘는 사건과 관련, 프랑스인들에게 피해를 배상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노근리사건의 소송 제기는 궁극적으로 그런 특별법의 제정 가능성을 높여주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피해자들의 의지이며 이를 지원하는 우리들의 마음자세다. 흔들리지 않고 방법을 찾는다면 길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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