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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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근해에 150조원대 금괴?

러 ‘드미트리 돈스코이호’ 러 - 일 전쟁 때 침몰... 국내 업체 참여 본격 탐사작업

  • 안산=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7-02-01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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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근해에 150조원대 금괴?
    94년 전의 대한해협과 동해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경기 안산시 한국해양연구소는 최근 10여년 동안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일본 여러 도시를 돌며 현지조사를 벌여 러일전쟁사료들과 포로들의 증언기록을 수집해 왔다. 다음은 그 내용을 토대로 구성한 보물선 침몰 시나리오다.

    “1904년 가을 북만주에서 러시아 육군은 일본군에 밀려 패퇴를 거듭했다.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2세는 마침내 흑해에 주둔하고 있던 ‘세계최강의 해군’ 발틱함대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차르는 발틱함대가 대한해협, 서-동해 등 한반도 주변 해안을 봉쇄해 만주주둔 일본군의 보급로만 차단하면 러일전쟁의 전황이 역전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해양硏, 전쟁사료-포로증언 수집

    34척의 전투함과 보급-병원선 등 38척으로 구성된 발틱함대는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아프리카희망봉`-`인도양`-`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긴 항해에 올랐다. 프랑스식민지 베트남에 도착했으나 영국의 눈치를 보는 프랑스정부는 병사들의 하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료인 석탄만 공급받고 바로 항해를 재개한 러시아 수병들은 6개월여만인 1905년 5월26일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이들에게 일본 해군은 전면 공세를 가했다.

    4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무적’ 발틱함대는 허망하게 전멸했다. 침몰한 배중엔 ‘나히모프’호라는 순양함도 있었다. 이 배는 러일전쟁의 군자금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던 금괴를 싣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이 배를 ‘회계함’이라고 불렀다.

    ‘회계함’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 수시간 동안 러시아군은 필사적으로 금괴들을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 Donskoi)호라는 6200t급 수송용 군함에 옮겨 실었다(이 때문에 드미트리 돈스코이호가 처음부터 금괴를 수송하는 배였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전투를 포기하고 전속력으로 대한해협을 빠져나왔다. 최종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 항. 그러나 추격해 온 일본군함에 의해 이 배는 5월29일 오전 6시46분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서 격침됐다.”

    그렇다면 발틱함대와 함께 수장됐다는 금괴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81년 드미트리 돈스코이호 인양작업에 나선 스쿠버다이버 출신 사업가 곽경배씨(당시 35세·도진실업 대표)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제독 크로체스 도엔스키 중장이 남겼다는 기록을 인용, 발틱함대는 현 시가로 150조원에 이르는 군자금을 싣고 있었다고 추정했다.

    위에서 언급한 시나리오가 사실이라면 울릉도 주변 바다 밑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엄청난 양의 보물이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시나리오의 신빙성에 관심이 모아지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초 일본과 프랑스는 대마도 인근에서 침몰된 군함 ‘나히모프’호의 선체를 실제로 발굴해 냈다. 놀랍게도 배 안에 금괴가 있는 것이 확인됐다. 한국해양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소련이 즉각 수장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소지가 생기자 일본은 발굴작업을 중단했다.

    81년 12월6일자 대구매일신문은 1905년 당시 13세였던 울릉도에 사는 한 할머니의 목격담을 기사화했다. 침몰된 배에서 빠져나온 10여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내보이며 ‘저 배에 금은보화가 가득 있다’는 몸짓을 했다는 것이다.

    러일전쟁사 전문가인 고려대 조명철교수는 “전쟁 막판에 몰린 러시아가 군자금을 발틱함대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군함은 군자금의 수송수단으로 삼기엔 위험부담이 컸으나 당시로선 발틱함대의 난파나 전멸은 러시아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 일본이 당시 1년치 정부예산의 10배에 이르는 돈을 러일전쟁 비용으로 썼다는 점을 고려할 때 러시아측 군자금의 규모도 엄청났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조교수는 말한다.

    81년 곽경배씨가 탐사에 착수하면서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전설’에서 ‘현실’의 무대로 끌어올려졌다. 곽씨는 1억여원을 들여 울릉도 저동항 앞바다 남동쪽 1.2km지점을 2년여에 걸쳐 탐사했다. 그러나 수심 40m밖에 들어 갈 수 없는 당시 장비로 성공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200m급 일본 유인잠수정이 동원되기도 했으나 곽씨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다. 러시아 보물선은 세인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금년 가을 한 건설업체가 러시아 보물선을 인양하기 위해 도전장을 냄으로써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10월8일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은 동아건설의 드미트리 돈스코이호 인양신청에 대해 2004년 12월까지 5년 기한내 사업을 마무리한다는 조건으로 최종 승인했다. 포항지방해양수산청 최경욱과장은 “광케이블 등 시설물을 파손하거나 어업에 지장을 줄 우려가 없고 인양가능성이 있어 허가를 내줬다”고 밝혔다.

    동아건설은 한국해양연구소에 이 사업을 맡기고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남극탐사로 이름이 알려진 한국해양연구소의 조사선 ‘온누리’호는 10월20일부터 3일간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서 해저 지형탐사작업을 벌였다. 6200t급 선박인양작업은 국내 최대규모다. 여기엔 무인원격조정로봇, 해저면탐사기 등 첨단 장비가 동원될 예정이다.

    러시아 보물선 인양작업에는 숱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인양을 하려면 우선 바닷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선체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 일 자체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구전과 기록에 조금씩 언급돼 있을 뿐 발굴대상의 존재 유무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침몰지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동아건설과는 별도로 3년전부터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발굴 연구를 해 온 대구지역 출판업자 오경철씨는 “침몰지점은 저동이 아닌 울릉도 주변 다른 지역”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동해의 거센 조류 때문에 배가 침몰 당시의 지점에서 수km∼수십km 정도 떠내려갔을 거라는 이야기다.

    소유권 싸고 외교갈등 빚을 소지

    한국해양연구소측도 이런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연구소 관계자는 “돈스코이호가 울릉도 근해 대륙붕 경사면에서 수심 1km가 넘는 심해 바닥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인양작업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연구소 관계자는 “다행히 대륙붕 위에 걸쳐져 있을 경우에는 바지선들 위에 설치한 크레인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 고려되고 있다”고 말했다. 금괴 등 보물이 실제로 있다면 선체는 분해될 수도 있다.

    보물이 인양된 뒤엔 소유권을 둘러싼 외교적 갈등이 뒤따를지 모른다. 국내적으로도 인양 주체와 인양을 허가한 정부 사이의 배분문제가 남는다.

    동아건설측은 “우리는 보물 자체보다는 기술 개발을 위해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이라고 말한다. 해양산업 진출시 러시아 보물선의 탐사`-`인양 과정에서 습득된 노하우를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국해양연구소의 관계자도 “각종 기술을 현장에서 적용해 보고 보완하는 정말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정치-경제적 가치가 날로 커지고 있는 해저탐사 분야의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호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 대해 줄기차게 이어지는 관심과 도전이 이 배를 둘러싼 ‘잘 짜인 이야기 구조’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러시아와 일본의 국운을 건 한판 승부, 이역만리에서 수몰된 패잔병들의 비극적 운명, ‘유령’이 떠돌아 다닐 법한 배 안 어딘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금괴, 미스터리를 낳는 고증자료들, 그리고 그 전설을 확인하러 나선 첨단기술.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탐사현장엔 과거와 현재, 미신과 과학이 혼재돼 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언제쯤 실체를 드러낼 것인가. 그 배에는 정말로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 있을까. 세기말의 보물선 찾기 작업은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3년 전 원나라 선박 발굴

    중국 동전 28t 등 발굴 세계적 화제로 … “해저 선박탐사는 장기투자 필요”


    바다에 빠진 배 찾기는 반드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그 배에서 많은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1976년 7월 목포시 신안 앞바다에서 1322년경 침몰한 원나라 선박이 발굴됐다. 배 안에서는 그야말로 노다지가 쏟아졌다. 2604점의 송-원대 도자기, 729점의 금속유물, 43점의 석재유물, 남방산 자단목 1017본, 기타 유물 1346점이 나왔다. 중국 동전 234종류 800만개(28t)가 발굴돼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동전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어서 인양경비의 17배가 넘을 정도였다. ‘신안 보물선’은 선박발굴의 경제적 효과를 입증시켜 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선박 발굴작업이 노다지를 가져다 주는 것만은 아니다.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위험이 크며 발굴까지에는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한국해양연구소에 따르면 80년대 초 소련 바렌츠해에 침몰된 영국 에든버러호의 금괴를 인양하는 데 투입된 자금은 당시 화폐가치로 60억원에 달했다. 타이타닉호의 경우 침몰직전의 무선교신으로 정확하게 침몰지점이 파악됐지만 본격 탐사에 나선지 15년이 지나서야 선체가 발견됐다.

    한국해양연구소 관계자는 “과거 금을 찾아 나선 모험이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듯 해저 선박탐사는 미래자원의 보고인 바다에 대한 장기적 투자와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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