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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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삶 비추는 사랑의 빛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러스트 앤 본’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5-06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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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팍팍한 삶 비추는 사랑의 빛
    삶은 항상 위기일까. 불황이 삶을 무너뜨렸을까. 붕괴 징후가 도처에 자리한 사회에서 개인에게 인생이란 다음 한 발자국을 기약할 수 없는 나락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앙티브로 가는 기차 안. 20대 중반 젊은 아빠와 어린 아들이 좌석에 앉아 있다. 아들이 말한다. “배고파요.” 아빠는 이 자리 저 자리를 다니면서 승객들이 남기고 간 음료며 빵 부스러기를 모아 아들과 함께 허겁지겁 입에 우겨넣는다. 곯은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떠돌던 아빠는 가게에 들어가 몰래 빵을 훔쳐 나온다. 길을 헤매다 가까스로 찾은 곳은 남자의 누나 집이다. 트럭을 타고 그들을 데리러 온 매형이 남자에게 말한다.

    “화물회사를 다니다 무더기 해고됐지. 냉동식품을 배달하는 중이야. 누나? 누나는 대형마트에서 캐셔로 일한다네.”

    남자와 어린 아들은 모처럼 누나 집에서 배를 채운다. 냉장고에는 통조림이 가득 들었다.

    “직장(마트)에서 몰래 가져온 거야. 유통기한이 지난 거니까 날짜 순서대로 먹어야 돼.”



    그렇게 불황은 삶을 잠식한다. 몇 년째 계속되는 경제위기가 이름 없는 삶들을 거리로 내몰고 벼랑 끝으로 떠민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프랑스 영화 ‘러스트 앤 본’은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최근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은 다른 작품들처럼 ‘러스트 앤 본’에도 미국과 유럽을 덮친 경제위기의 그림자가 무거운 공기처럼 스크린 깊이 침잠해 있다. 여기로부터, 위기에 이른 삶으로부터, 언제 벗어날지 모르는 나락으로부터 ‘러스트 앤 본’은 구원과 희망의 빛을 찾아간다. 컴컴한 동굴 속 같은 삶에 어디서인지 모르게 빠끔히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은, 사랑이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운명의 끈’

    ‘러스트 앤 본’은 닳고 닳은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지녔지만 델 것만 같은 뜨거운 드라마와 폭력, 육체, 헌신, 사랑에 대한 성찰이 객석에 압도적인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삼류 복서인 남자 주인공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 분)는 벨기에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전 부인에게서 다섯 살 아들을 갑자기 떠맡는다. 오갈 데 없는 부자는 프랑스 앙티브에 있는 누나 집에 겨우 몸을 의탁한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알리는 새 일자리로 클럽 경호원 일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클럽에서 한 사내와 티격태격하다 주먹에 맞아 떨어진 여성 스테파니(마리옹 코티야르 분)를 돕게 된다. 당당하고 매력적인 스테파니에게 끌린 알리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연락처를 남긴다. 알리는 그녀 집에 있는 사진과 신문기사를 통해 스테파니가 놀이공원에서 범고래쇼를 이끄는 조련사임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족관에서 쇼를 지휘하던 스테파니는 난데없는 범고래의 발작으로 두 다리를 잃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자신의 미모와 건강한 육체에 누구보다 자신감이 컸던 스테파니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 불현듯 알리에게 전화를 한다.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가며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다.

    클럽 경호원으로, 주차장 야간 관리원으로, 사설 경비업체 기사로 닥치는 대로 일하고 가진 것은 몸뚱이뿐이라며 거친 본능에 따라 뭇 여성과 즐기며 살던 알리. 사고 충격과 육체적 장애로 인한 극도의 상실감마저도 감히 무너뜨리지 못한 당당한 자의식의 소유자 스테파니.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이어주는 ‘운명의 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사고 전 스테파니가 가졌던 건강하고 매끈한 다리를 유독 자주 클로즈업한다. 이는 범고래 이빨에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의 깊은 절망감과 상실감을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알리는 사고 전이나 후나 스테파니를 똑같이 대한다. 본능대로 사는 알리에게 스테파니가 가진 건강하고 관능적인 매력은 단지 육체로부터 나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두 다리와 함께 ‘사랑의 희열’마저도 포기해야 했던 스테파니는 알리를 통해 여전히 뜨겁게 꿈틀대는 욕망을 확인한다. 두 사람의 섹스는 그 어느 남녀의 관계보다 에로틱하고, 정력적이며, 아름답다. 그러므로 ‘러스트 앤 본’은 멜로드라마일 뿐 아니라 개인의 삶을 사지로 내모는 ‘병든 사회’와 막다른 골목에서도 삶의 즐거움 및 사랑의 열락에 충실한 두 남녀의 건강한 아름다움이 대비를 이루는 현대사회에 관한 ‘음화(陰畵)’이자 우화다.

    팍팍한 삶 비추는 사랑의 빛
    우여곡절 그러나 ‘해피엔딩’

    삶이란 마땅히 육체에 근거하면서도, 육체를 뛰어넘음으로써 미물이 아닌 인간의 것이 된다. 사랑 또한 육체에 근거하면서도, 육체를 넘어섬으로써 완성을 향해가는 그 무엇이다. 경제위기는 육체의 보존을 어렵게 하는 시련이다. ‘러스트 앤 본’은 삶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인간이 연명을 위해 벌이는 필사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몸뚱이를 던져 몸뚱이를 지켜낸다. 알리의 삶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알리는 또 다른 벌이를 위해 불법인 내기 격투기에 출전한다. 하지만 그의 고단한 싸움은 자신뿐 아니라, 어린 아들과 운명의 연인인 스테파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육체적으로 완전한’ 알리와 ‘육체가 손상된’ 스테파니에게 사랑이란 물론 몸으로부터 기원하는 쾌락이며 행복이지만, 점차 그것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영혼의 교감이 돼간다.

    여전히 알리는 생계를 위해 쫓기듯 떠나야 하고, 알리 누나는 대형마트에서 해고 통보를 받으며, 알리의 어린 아들 앞에 펼쳐진 인생 역시 한 발 잘 못 디디면 죽음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일 테지만, 그 모두에게 자명한 사실 하나는 삶도, 사랑도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관객이 결국 알리와 스테파니의 ‘해피엔딩’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강력하고 타당한 이유가 아닐까. 물론 마티에스 쇼에나에츠와 마리옹 코티야르의 매혹적인 연기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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