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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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들 덕분에 행복한 인생 제자 양성은 내 운명”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강정숙 교수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5-06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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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님들 덕분에 행복한 인생 제자 양성은 내 운명”
    그의 공연에는 미친 듯 날뛰며 환호하는 광란의 몸짓도, 번쩍이는 야광봉도 없다. 가슴을 뜯고 혼을 울리는 소리에 매료된 황홀한 탄식만 있을 뿐이다.

    “그가 (가야금) 산조를 할 때마다 노래도 하지 않았는데 늘 소리가 들려온다, 삶의 노랫소리가. 꽃이 피면 이내 지고 달이 차면 마침내 기울고 잎 또한 무성하다가 이윽고 시드는 우리네 삶의 영혼을 그는 언제나 불러내 노래한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영혼 그 자체인가 보다.”

    2001년 발매한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 The Memory’ 앨범 재킷의 서문에서 노동은 중앙대 국악대학장(현 전통예술학부 음악학 교수)이 말한 그가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강정숙 교수(용인대 문화예술대학 국악과·61)다.

    강 교수가 이사장을 맡은 사단법인 가야금병창보존회는 전남 구례군청과 함께 5월 11, 12일 이틀에 걸쳐 전남 구례에서 ‘제11회 전국 가야금 경연대회’를 개최한다. 참가자들은 초중고등부와 일반부, 신인부로 나눠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 가야금창작을 겨룬다. 대회 첫날 예선이 끝나면 고(故) 서공철 선생 추모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지난 10년간 서울에서 개최된 경연대회가 올해 처음 구례군에서 열린다. 가야금산조의 명인이자 스승인 고 서공철 선생을 기리는 작업으로, 자비를 털어 대회를 만든 강 교수는 “선생님이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셨기에 무엇보다 이번 대회가 뜻깊다”고 했다.

    ‘서공철류 가야금산조’의 계보를 이은 강 교수가 스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세 때다. 말년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서 선생은 생전 마지막 제자가 될 어린 강 교수를 무척 아꼈다.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계보 이어

    “선생님이 서울 창덕궁 낙선재 뒤에 사셨어요. 양철지붕을 얹은 집이라 여름철이면 방 안이 찜통이 됐죠. 땀을 뻘뻘 흘리며 가야금 연습을 하는데 선생님이 ‘밖에 함박눈이 펄펄 내리네’ 하시는 거예요. 속으로 ‘더워죽겠는데 무슨 함박눈인가’ 싶었죠. 그런데 선생님은 한겨울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상상을 하면서 그 느낌을 가야금에 실어 연주하라는 거예요. 중모리를 타면 봄이 오고, 중중모리로 넘어가면 군자(님)가 찾아오고, 자진모리를 타면 희로애락이, 휘모리로 넘어가면 ‘청춘이 다 가버린다’고 하셨어요. 마지막 뒤풀이를 타면 ‘인생이 마무리된다’고 하시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단이 넘어갈 때마다 감정을 담아주셨어요.”

    어린 나이에 뜨거운 양철지붕 아래서 가야금을 타며 스승의 계보를 잇겠다고 약속한 강 교수는 “혼자 명맥을 지키느라 참 외로웠다”고 했다.

    “전통음악 유파가 많은 데다 대학에서도 많은 유파를 배출했지만 서공철류는 저 아니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어요. 저보다 앞선 제자들이 시집가거나 외국으로 나가는 바람에 그렇게 됐죠. 다행히 저한테는 국립국악원이라는 무대가 있어 공연을 이어올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관객들 반응이 뜨거웠어요. 서공철류 가락을 절대 놓지 말라고 당부하는 분도 많아 참 감사하죠.”

    강 교수는 가야금산조보다 판소리를 먼저 배웠다. 어린 시절 나무틀로 된 라디오에서 울려나오는 가야금 소리를 천상의 소리로 들은 강 교수는 “그때부터 국악이 좋았다”고 했다. 경남 함양 출신으로 전북 남원에서 성장한 그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판소리를 배우던 언니(강문숙)를 따라 초등학생 때 판소리에 입문했다. 이후 판소리 명창 김소희 선생의 눈에 띄어 가족과 떨어져 홀로 서울로 상경한 뒤 한동안 김 선생 자택에서 기거하며 소리를 배웠다.

    “1976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갔을 때 박동진(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김소희(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예능보유자), 박초월(중요무형문화재 수궁가 보유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보유자) 선생 등 유명한 문화재 선생님이 그곳에 다 계셨어요. 그 시절 이매방 선생님한테 춤도 배웠는데, 당시 좋은 공연을 많이 구경하고 창극에 뮤지컬까지,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서 아쉬운 게 없었어요. 스승 복이 참 많았던 거죠.”

    국악계 큰 별이던 스승들로부터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우고 전통춤까지 익힌 강 교수는 20~30대를 국립창극단과 국립국악원에서 보내면서 ‘심청전’ ‘춘향전’ 등 창극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고, 정부 문화사절로 해외 순회공연을 수없이 다녔다. KBS, MBC 등 방송국이 마련한 창작 창극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외부 활동이 많아지자 어느 날 창극단에서 바깥 활동을 일절 금지했다.

    “창극단 무대에만 전념하라는 건데 그때 제 생각은 달랐어요. 기량을 갈고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고 알려야 하지 않나 싶어 사표를 냈어요.”

    젊은 주인공이 필요했던 창극단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박귀희 선생님이 단장님을 찾아가 ‘정숙이가 도저히 돌아올 기미가 없으니까 놔줘라’고 하셔서 그만둘 수 있었어요.”

    “가야금 없었으면 외로웠을 것”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보유자인 고 박귀희 선생은 고 서공철 선생과 함께 강 교수의 ‘두 분 스승’ 가운데 한 명이다.

    “선생님은 한 장르를 배워도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제 노래가 맘에 안 들면 제대로 될 때까지 ‘도련님 이별자로 나오시는디’ 하면서 같은 구절을 수없이 반복하시고 따라하게 해 별명을 ‘축음기’라고 붙였죠. 선생님처럼 노래에 감정을 실으라는데, 방금 배운 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며칠씩 반복되니 저만 애가 터져 죽죠.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셨어요.”

    강 교수는 박귀희 명창의 호 ‘향사(香史)’를 딴 추모음악제 ‘향음재(香音齎)’를 매년 하반기에 연다.

    1986년 제4회 신라문화제 기악부 대상(대통령상)을 수상한 강 교수는 이듬해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느 날 목이 아파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물혹이 생겨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혹시 목소리에 이상이 생길까 봐 후유증을 걱정한 강 교수가 수술을 거부하자 의사는 “노래를 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꾀꼬리한테 노래하지 말라면 어떻게 하느냐”며 병원을 나온 강 교수는 그때부터 몸을 추스르려고 먹기 싫어도 먹는 연습을 하고 운동에 매달렸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체력이 있어야 해요. 산(山)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가면 어떤 땐 한 달 넘게 틀어박혀 하루 18시간 이상 가야금을 타고 소리를 해요. 오로지 먹고 자고 가야금 타는 일이 전부죠. 손가락 끝이 다 갈라터지고 나중에는 목소리도 안 나와요. 철저히 자기와의 싸움이죠.”

    수년간의 병치레를 이겨낸 강 교수는 1990년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화려한 도약을 알렸다. 국악계 최초로 ‘가야금산조 및 병창 발표회’를 열었던 것. 당시 스승인 박귀희 선생은 “한 포기의 고귀한 난처럼 곧은 듯 부드럽고 섬세한 음률의 소유자다. 예인으로서의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제자”라고 탄복했다.

    “나를 낳아준 건 부모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준 건 선생님들이다. 살다 보면 막막할 때가 있다. 벽에 부딪혔을 때도, 기쁠 때도 늘 돌아가신 선생님들이 보고 싶다”는 강 교수는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로 ‘제자 양성’을 택했다. 그것이 자신을 통해 스승을 알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에서 제자를 키우는 일과 가야금 경연대회 주최 외에도 3년 전 직접 개설한 학점은행제를 통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온 그가 제자들을 자식 삼아 ‘내리사랑’을 이어가는 셈이다. 시각장애인 제자를 양성할 계획을 세운 강 교수는 “지난해까지 가야금 경연대회 입상자에겐 대학 수시입학 자격이 주어졌는데 올해부터 없어져 아쉽다”고 했다. 평생 예인으로 살아온 강 교수는 “악기와 나 사이에 애증이 있다”고도 했다.

    “잘되면 예쁘고, 싫으면 확 던져버리고 싶죠. 20대 때는 쳐다보기도 싫고 야속해서 한동안 손에서 놔버린 적도 있어요. 그런데 비 오는 어느 날 거리를 걷는데 가게 스피커에서 띵띵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가야금 소리인 줄 알았더니 기타 소리였어요. 환청이 들린 건데 ‘내가 미쳤구나’ 싶었죠.”

    이미 놓은 줄 알았던 가야금을 그때까지 마음에서 놓지 못했던 것이다. “가야금이 없었으면 인생이 참 외로웠을 것”이라는 강 교수는 “가야금과 더불어 행복했고 인생 공부도 많이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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