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1일’에 대해 혹시 들어본 적 있는지. 한국에서라면 대선(12월 19일) 이틀 후라 대통령이 된 자에겐 만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쁜 날일 것이요, 낙선한 후보와 정치세력에겐 세상이 다 끝난 것 이상으로 참담하고 괴롭고 슬픈 날일 것이다. 다른 이에겐 특별할 게 없는 금요일일 것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적잖은 사람이 이날을 인류 최후의 날로 믿는다. 호사가인지 신비주의자인지 몰라도 마야문명에서 사용한 달력이 그 날짜를 끝으로 더는 없으니, 그날이 바로 이 세상의 ‘임종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미국의 한 과학자는 ‘주역’을 분석한 결과 인류 최대의 비극이 일어나는 날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 예언과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꼼꼼히 따져보고 숨은 뜻을 캐보니 올해가 가기 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메시지가 있더라는 얘기도 전한다. 주식시장을 예측하는 프로그램 ‘웹봇’이 2012년 12월 21일에 대한 전망만은 거부해, 이날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체불명의 소문도 있다.
서구의 철학이나 종교가 목적론적 세계관에 근거하며, 종말론을 전제로 한다는 학구적 분석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인류는 다양한 형태로 최후의 날을 상상해왔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은 종말론에 깃든 공포와 불안이 곧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2012’ ‘지구가 멈추는 날’ 등 인류 종말을 다룬 수많은 작품이 관객의 지갑을 열었다. 이들 작품에서 지구의 운명을 위협하는 것은 파충류를 닮은 외계인에서부터 노아의 방주 이후 최대의 물난리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다. 인류 스스로 핵전쟁을 일으켜 멸망을 재촉하는가 하면, 지구와 다른 행성이 충돌하기도 한다.
설법까지 하는 ‘득도한 로봇’
한국 영화도 드디어 종말이라는 화두를 부여잡았다. 러닝타임이 40~50분인 중·단편 영화 3편을 하나로 묶은 옴니버스 형식의 SF 판타지 ‘인류멸망보고서’다. 김지운 감독이 로봇을 소재로 ‘천상의 피조물’을 연출했고, 임필성 감독이 ‘멋진 신세계’와 ‘해피버스데이’로 2편을 더했다. SF 판타지에 본격 도전한 장르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미래 사회의 묵시록과 한국 영화의 상상력이 만났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잔혹코미디 ‘조용한 가족’과 블랙코미디 ‘반칙왕’, 공포영화 ‘장화, 홍련’, 느와르 ‘달콤한 인생’, 서부극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스릴러 ‘악마를 보았다‘ 등 만드는 작품마다 장르를 달리하며 화제를 모은 김지운 감독은 ‘천상의 피조물’에서 로봇을 통해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한 로봇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미래의 어느 날. 로봇 개발 회사 UR의 엔지니어 박도원(김강우 분)은 천상사에서 쓰는 로봇 RU-4의 점검 및 수리를 의뢰받는다. 그런데 그가 천상사에서 마주한 상황은 아주 난감하고 곤혹스러울 뿐 아니라 놀라울 지경이다. 인간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허드렛일이나 대신해야 할 RU-4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은 물론, 깨달음까지 얻어 승려에게 설법을 펴는 게 아닌가.
스님들은 RU-4에 인명 스님이라는 법명을 붙여 ‘산 부처’로 추앙하지만, 로봇 개발 회사 UR는 ‘오작동된 로봇’으로 규정한다. 인간이 편리하려고 만들어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답고, 인간보다 더 앞선 깨달음을 얻어 삶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로봇. 해탈이냐 고장이냐. 산 부처냐 에러 난 로봇이냐. 이것이 ‘천상의 피조물’이 던지는 철학적 화두다. 로봇 개발 회사는 회장까지 나서서 RU-4의 폐기를 결정하지만 천상사 주지와 혜주 보살(김규리 분)을 비롯한 승려들, 그리고 엔지니어 박도원마저 반대하고 나선다.
로봇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비롯해 영상의 완성도가 빼어나다. 이보다 더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은 고승의 선문답을 방불케 하는 로봇의 대사다. 혜주 보살이 로봇 개발 회사의 결정에 맞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자, RU-4는 자신의 팔을 직접 잘라 보이며 말한다.
“이것은 무엇으로 보입니까? 모든 사물과 현상은 인간의 지각이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지각은 공이고, 지각되는 존재 또한 공이니 나 또한 공일 뿐입니다.”
인류의 삶을 좌우하고 국가를 움직일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의 기업가(송영창 분)인 로봇 개발 회사 회장은 현대 사회에서 창조자인 인간이 오히려 소외된다며 인간의 명령을 벗어난 로봇은 인류에게 재앙이라고 거듭 주장한다. 이에 대해 RU-4는 가장 인간다운 권리이자, 신으로부터 받은 최후의 자유를 직접 실행해 보이며 자신이 로봇을 넘어선 존재임을 강조한다.
로봇의 반란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본 소재지만, 사이보그의 ‘깨달음’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주제다. RU-4의 목소리를 맡은 박해일의 탁월한 연기와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로봇의 멋진 동작은 이 영화의 미덕이다.
별종 인플루엔자와 좀비 출현
충무로의 재능 있는 젊은 감독으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남극일기’ ‘헨젤과 그레텔’ 등으로 연거푸 흥행에 실패한 임필성 감독은 한국 사회의 ‘현재’에 대한 쓰디쓴 농담으로 미래 사회를 그려냈다. ‘멋진 신세계’에서 인류의 재앙은 데이트에 정신이 팔린 한 청년(류승범 분)이 음식물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서 시작된다. 불순물을 섞은 음식물쓰레기를 사료로 재가공해 소에게 공급하고, 오염된 고기를 먹은 사람이 변종 인플루엔자와 결합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돼 좀비가 돼가는 내용이다.
전염병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이를 “북한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전문가에서부터 “정당의 선거 득표율과 지역별 발병률이 같다”고 분석하는 시사평론가, “의학연구자인 ‘황 박사’를 복귀시켜야 한다”고 나서는 이들, 그리고 “생화학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미국의 반응까지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우리 사회에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을 풍자한 대목이 웃음을 자아낸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윤제문, 마동석, 김무열, 조윤희, 류승수 등이 조연으로 등장한 점 또한 주요 관전 포인트다.
‘해피버스데이’는 당구광인 아빠의 8번 당구공을 부서뜨린 소녀(진지희 분)가 몰래 인터넷으로 새것을 주문했다가 2년 후 거대한 혜성으로 돌려받아 지구와 충돌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러운 설정이다. 외계인이 침공하는 바람에 멸망 위기에 처한 지구를 미국과 일본의 연합 해병대가 막아낸다는 내용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배틀쉽’과 같은 날(4월 11일) 개봉했다. 비교해가며 봐도 재미있을 법하다. 제작비는 ‘배틀쉽’과 ‘해피버스데이’가 각각 2억 달러(2200억 원)와 36억 원으로 하늘과 땅 차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적잖은 사람이 이날을 인류 최후의 날로 믿는다. 호사가인지 신비주의자인지 몰라도 마야문명에서 사용한 달력이 그 날짜를 끝으로 더는 없으니, 그날이 바로 이 세상의 ‘임종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미국의 한 과학자는 ‘주역’을 분석한 결과 인류 최대의 비극이 일어나는 날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 예언과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꼼꼼히 따져보고 숨은 뜻을 캐보니 올해가 가기 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메시지가 있더라는 얘기도 전한다. 주식시장을 예측하는 프로그램 ‘웹봇’이 2012년 12월 21일에 대한 전망만은 거부해, 이날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체불명의 소문도 있다.
서구의 철학이나 종교가 목적론적 세계관에 근거하며, 종말론을 전제로 한다는 학구적 분석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인류는 다양한 형태로 최후의 날을 상상해왔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은 종말론에 깃든 공포와 불안이 곧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2012’ ‘지구가 멈추는 날’ 등 인류 종말을 다룬 수많은 작품이 관객의 지갑을 열었다. 이들 작품에서 지구의 운명을 위협하는 것은 파충류를 닮은 외계인에서부터 노아의 방주 이후 최대의 물난리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다. 인류 스스로 핵전쟁을 일으켜 멸망을 재촉하는가 하면, 지구와 다른 행성이 충돌하기도 한다.
설법까지 하는 ‘득도한 로봇’
한국 영화도 드디어 종말이라는 화두를 부여잡았다. 러닝타임이 40~50분인 중·단편 영화 3편을 하나로 묶은 옴니버스 형식의 SF 판타지 ‘인류멸망보고서’다. 김지운 감독이 로봇을 소재로 ‘천상의 피조물’을 연출했고, 임필성 감독이 ‘멋진 신세계’와 ‘해피버스데이’로 2편을 더했다. SF 판타지에 본격 도전한 장르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미래 사회의 묵시록과 한국 영화의 상상력이 만났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잔혹코미디 ‘조용한 가족’과 블랙코미디 ‘반칙왕’, 공포영화 ‘장화, 홍련’, 느와르 ‘달콤한 인생’, 서부극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스릴러 ‘악마를 보았다‘ 등 만드는 작품마다 장르를 달리하며 화제를 모은 김지운 감독은 ‘천상의 피조물’에서 로봇을 통해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한 로봇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미래의 어느 날. 로봇 개발 회사 UR의 엔지니어 박도원(김강우 분)은 천상사에서 쓰는 로봇 RU-4의 점검 및 수리를 의뢰받는다. 그런데 그가 천상사에서 마주한 상황은 아주 난감하고 곤혹스러울 뿐 아니라 놀라울 지경이다. 인간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허드렛일이나 대신해야 할 RU-4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은 물론, 깨달음까지 얻어 승려에게 설법을 펴는 게 아닌가.
스님들은 RU-4에 인명 스님이라는 법명을 붙여 ‘산 부처’로 추앙하지만, 로봇 개발 회사 UR는 ‘오작동된 로봇’으로 규정한다. 인간이 편리하려고 만들어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답고, 인간보다 더 앞선 깨달음을 얻어 삶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로봇. 해탈이냐 고장이냐. 산 부처냐 에러 난 로봇이냐. 이것이 ‘천상의 피조물’이 던지는 철학적 화두다. 로봇 개발 회사는 회장까지 나서서 RU-4의 폐기를 결정하지만 천상사 주지와 혜주 보살(김규리 분)을 비롯한 승려들, 그리고 엔지니어 박도원마저 반대하고 나선다.
로봇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비롯해 영상의 완성도가 빼어나다. 이보다 더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은 고승의 선문답을 방불케 하는 로봇의 대사다. 혜주 보살이 로봇 개발 회사의 결정에 맞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자, RU-4는 자신의 팔을 직접 잘라 보이며 말한다.
“이것은 무엇으로 보입니까? 모든 사물과 현상은 인간의 지각이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지각은 공이고, 지각되는 존재 또한 공이니 나 또한 공일 뿐입니다.”
인류의 삶을 좌우하고 국가를 움직일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의 기업가(송영창 분)인 로봇 개발 회사 회장은 현대 사회에서 창조자인 인간이 오히려 소외된다며 인간의 명령을 벗어난 로봇은 인류에게 재앙이라고 거듭 주장한다. 이에 대해 RU-4는 가장 인간다운 권리이자, 신으로부터 받은 최후의 자유를 직접 실행해 보이며 자신이 로봇을 넘어선 존재임을 강조한다.
로봇의 반란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본 소재지만, 사이보그의 ‘깨달음’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주제다. RU-4의 목소리를 맡은 박해일의 탁월한 연기와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로봇의 멋진 동작은 이 영화의 미덕이다.
별종 인플루엔자와 좀비 출현
충무로의 재능 있는 젊은 감독으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남극일기’ ‘헨젤과 그레텔’ 등으로 연거푸 흥행에 실패한 임필성 감독은 한국 사회의 ‘현재’에 대한 쓰디쓴 농담으로 미래 사회를 그려냈다. ‘멋진 신세계’에서 인류의 재앙은 데이트에 정신이 팔린 한 청년(류승범 분)이 음식물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서 시작된다. 불순물을 섞은 음식물쓰레기를 사료로 재가공해 소에게 공급하고, 오염된 고기를 먹은 사람이 변종 인플루엔자와 결합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돼 좀비가 돼가는 내용이다.
전염병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이를 “북한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전문가에서부터 “정당의 선거 득표율과 지역별 발병률이 같다”고 분석하는 시사평론가, “의학연구자인 ‘황 박사’를 복귀시켜야 한다”고 나서는 이들, 그리고 “생화학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미국의 반응까지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우리 사회에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을 풍자한 대목이 웃음을 자아낸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윤제문, 마동석, 김무열, 조윤희, 류승수 등이 조연으로 등장한 점 또한 주요 관전 포인트다.
‘해피버스데이’는 당구광인 아빠의 8번 당구공을 부서뜨린 소녀(진지희 분)가 몰래 인터넷으로 새것을 주문했다가 2년 후 거대한 혜성으로 돌려받아 지구와 충돌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러운 설정이다. 외계인이 침공하는 바람에 멸망 위기에 처한 지구를 미국과 일본의 연합 해병대가 막아낸다는 내용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배틀쉽’과 같은 날(4월 11일) 개봉했다. 비교해가며 봐도 재미있을 법하다. 제작비는 ‘배틀쉽’과 ‘해피버스데이’가 각각 2억 달러(2200억 원)와 36억 원으로 하늘과 땅 차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