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월 20일 연평도 해병대 부대를 방문해 장병과 포옹하고 있다.
“정치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혁신 작업을 같이 할 수 있게 돼 참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여야 당수(黨首)로 처음 만난 1월 17일, 두 여성 지도자가 나눈 첫 대화다. 집권여당과 제1야당 대표를 모두 여성이 맡은 것은 우리 헌정 사상 처음이다.
두 여성 당수의 회동은 덕담이 오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회담 분위기만 좋았던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이 공천에서부터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국민참여경선’ 도입을 위한 선거법 개정에도 의견을 같이했다. 박 비대위원장은 “공천이 힘 있는 몇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한 대표도 “국민 뜻에 맞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공천혁명이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화답했다.
여성시대(女性時代)가 바야흐로 우리 정치권에 도래했다. 박 비대위원장과 한 대표 외에도 이정희, 심상정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전면에 나서서 대한민국 정치를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여성 정치인이 전면에 나선 이후 대립과 갈등의 정치가 아닌, 화합과 포용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섬세한 배려의 정치 가능
한나라당 한 초선의원은 “개발과 성장이라는 거대담론 중심의 정치를 펴오는 과정에서 양극화가 심화했고, 이로 인해 소외된 국민이 적지 않았다”며 “여야에서 여성 정치인이 전면에 나선 만큼 우리 사회 구석구석까지 따뜻함이 스며드는 섬세한 배려의 정치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경기 고양시 일산 동구에 민주통합당 예비후보로 등록한 유은혜 후보도 “권위주의 문화가 깨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더는 일방통행식 주의나 주장은 통하지 않게 됐다”며 “공감능력이 있고 쌍방향 소통을 잘하는 지도자를 찾는 과정에서 여성 지도자가 전면에 나서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여성 당수시대의 도래에 대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도자에 오른 것이 아니라, (당 대표에 오른) 여성 정치인이 그동안 선보인 리더십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며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성실성을 갖춘 여성 지도자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자연스럽게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한명숙 두 지도자는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에 앞서 ‘정치력’을 검증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침몰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나선 박 비대위원장은 천막당사로 상징되는 대대적인 쇄신으로 한나라당을 구했다. 총선 이후에도 원칙과 정도를 앞세운 당 운영으로 한나라당의 집권 기반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비대위원장의 한 측근은 “당 대표 시절 박 비대위원장은 정치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공천권도 모두 하부 조직으로 이양하는 등 원칙과 신뢰에 입각해 공평무사하게 당 살림을 꾸려나갔다”며 “그러한 노력이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1월 26일 15년 만에 ‘한나라당’이라는 당의 간판을 내리고 새 당명을 국민공모를 통해 정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12월 1일 동아일보·채널A 공동인터뷰에서 “속까지 확 바꿔야 한다”며 대대적인 쇄신을 역설한 바 있는 박 비대위원장이 당명 교체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이명박 정부 후반기에 심각한 민심이반으로 침몰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이 또다시 ‘박근혜 비대위’를 출범시킨 것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대선자금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과 대통령 탄핵 장본인이라는 두 난관을 홀로 뚫은 박 비대위원장의 강단 있는 정치력을 한나라당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지도자의 리더십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명숙 대표도 박 비대위원장과 견줘 손색없는 이력을 자랑한다. 박 비대위원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 한동안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다면, 같은 시대에 한 대표는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투사의 경력을 쌓았다.
이뿐 아니라 한 대표는 풍부한 국정 운영 경험도 갖췄다.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서 환경부 장관을 역임한 뒤 여성 최초로 국무총리를 지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도전했다가 근소한 표차로 낙선한 그는 지난 2년간 ‘뇌물수수’ 혐의를 두고 검찰과 지루한 법정공방을 벌인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사심’을 배제한 탕평인사 실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1월 21일 서울 동작구 청운복지원을 찾아 노인들의 발을 지압해주고 있다.
여성 당수시대가 열린 이후 우리 정치권에는 변화 바람이 조금씩 일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당직 인선에서 비교적 탕평인사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박 비대위원장은 취임 초 노·장·청 조화를 이룬 비대위원 인선으로 호평받았다. 특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인 소견을 가진 김종인, 이상돈 비대위원을 영입한 것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박 비대위원장과 가까운 한 의원은 “당 운영에서 ‘사심’을 배제한 탕평인사가 박 위원장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성이 당 대표를 맡을 때는 자기 사람을 심으려는 분파적 당직인사를 단행해 당을 대결구도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며 “박 위원장은 화합형 탕평인사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또 화합과 통합, 설득이 필요할 때 박 위원장이 전면에 나섰다”면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자기과시를 하지 않는 여성 지도자 특유의 포용력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 역시 여러 세력이 한곳에 모인 연합군 성격의 민주통합당을 당직 인선을 계기로 화학적 결합을 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대표는 노동계 배려 차원에서 이용득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여성계 몫으로 남윤인순 내가꿈꾸는나라 공동대표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했다. 민주통합당 한 관계자는 “여성 당 대표(한명숙)와 최고위원(박영선)이 배출된 만큼 총선과 대선을 고려해 남윤인순 최고위원 대신 다른 인사를 임명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한명숙 대표가 적극 주장해 관철했다”고 말했다.
국민이 참여하는 전당대회를 통해 한 대표와 박영선 최고위원을 선출한 데 이어 남윤인순 최고위원까지 지명됨으로써 1월 25일 현재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8명 가운데 3명이 여성이다. 우리나라 정당 사상 유력 정당 지도부에 과반수에 가까운 여성이 최고위원을 맡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당료 생활 10년이 넘은 민주통합당 한 여성 당직자는 “과거에는 여성이 ‘배려’ 차원에서 지도부에 1명 정도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당 대표를 포함해 3명의 여성이 지도부를 구성한 것을 보니 시대가 많이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1월 25일 총선기획단장에 이미경 의원을 임명했다. 당 대표와 총선을 실무적으로 총괄할 직책을 모두 여성이 맡게 된 것이다.
부정부패 끼어들 여지도 적어
전문가들은 ‘여성 정치인’의 강점으로 부정부패가 끼어들 여지가 적다는 점을 꼽는다.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 출신 지역과 학연, 사회적 지위에 크게 영향 받는 남성의 경우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부정부패의 연결고리에 노출되기 쉽지만, 여성은 관계를 이용한 사적 접근이 쉽지 않아 부패에 연루될 소지가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박 비대위원장의 한 측근은 “(박 비대위원장에게) 사적 인연을 앞세워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박 비대위원장이) 부정부패에 노출될 우려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여성 당수시대를 연 박근혜, 한명숙 두 여성 지도자가 앞으로 어떤 새 정치를 펼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 비대위원장이 당 전면에 나선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지났고, 한 대표는 고작 열흘 남짓 지났기 때문이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공천심사위원회 구성을 통해 4월 총선에 국민 지지를 받는 새 인물을 얼마나 내세울 수 있느냐가 1차 과제가 됐다. 아울러 어떤 정책으로 등 돌린 민심을 돌아서게 만들 것인지도 관심사다. 당명 교체 추진으로 ‘새 부대’를 마련하더라도 그 안에 담을 ‘새 술(콘텐츠)’이 무엇이냐에 따라 국민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비대위원장이 일찌감치 내세운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이번 총선에 어떻게 구체화해 선보일지 주목된다.
한명숙 대표 역시 4월 총선이 리더십을 검증받는 중요한 시험무대가 될 전망이다. 당 대표 선출로 정치적 부활에 성공했다지만, 2010년 서울시장 후보시절 TV토론 등에서 ‘가슴에 와 닿는 콘텐츠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던 그다. 이 때문에 당내 화합과 범야권 선거연합 못지않게 총선에 내세울 생활밀착형 정책이 무엇이 될지를 주목하는 국민이 많다. 무엇보다 2010년 지방선거 때 재미를 봤던 무상급식 등 이른바 ‘무상 시리즈’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오랜 우려를 두 여성 지도자가 어떻게 불식시켜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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