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시민참여투표가 열린 서울 장충체육관 앞에서 최규엽 민주노동당 후보, 박영선 민주당 후보, 박원순 시민후보가(왼쪽부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표직 사퇴라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돌출 행보에 대한 당내 의원들의 불만은 컸다. 수도권의 한 3선 의원은 “사퇴를 번복하지 않으면 더는 같이 정치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다. 결국 손 대표의 ‘회군 결정’으로 대표직 사퇴는 ‘1박2일’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손 대표의 마음을 돌리려고 경기 분당 자택을 찾았던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사퇴 반대를 의결한 ‘당의 명령’이라는 점, 그리고 아름다운 경선이라고 해놓고 대표에서 사퇴하는 것은 자칫 ‘경선불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 사퇴 결심이 흔들린 것 같다”고 전했다.
안팎서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민주당 의원에게 손 대표의 ‘나 홀로 결단 정치’는 일종의 데자뷰다. 손 대표는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경선 룰과 관련해 정동영 후보와 갈등을 빚던 중 참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사라졌던 전력이 있다.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등 3명의 전·현직 대표 체제에서 대변인을 지낸 우상호 전 의원은 “가장 중요할 때 측근의 말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스타일이 정치인 손학규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 대표직 사퇴 철회와 무관하게 손 대표의 ‘나 홀로 결단 정치’ 스타일을 회의적으로 보는 당내 의원이 적지 않다. 손 대표가 박원순 변호사를 도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승리로 이끈다 해도 리더십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많은 이유다.
서울시장 범야권 경선 패배, 그에 이어진 당 대표 사퇴 파동은 민주당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민주당은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 단일화에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에게 패한 데 이어, 이번에도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해 ‘불임정당’이라는 불명예를 또다시 안게 됐다.
더욱이 민주당 인사들이 서울시장 경선 패배 과정에서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10월 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야권 단일후보 경선에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박원순 변호사에게 패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경악했다. 유모차 부대와 젊은이의 자발적 참여가 낳은 59.59%의 경이적 투표율에 담긴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 핵심 당직자는 “휴일인데 왜 이렇게 젊은 사람이 많이 오느냐”며 경선 현장에서 볼멘소리를 했을 정도다.
한나라당과 맞붙는 선거 때마다 민주당의 지지세력으로 봤던 20~30대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를 오히려 걱정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한 것이다. 현장에서 투표율을 챙기던 한 의원은 “민주당이 동원한 유권자는 죄다 50대 이상의 아줌마, 아저씨고 저쪽은 온통 젊은 층인 상황에서 마치 우리가 한나라당이 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야권 단일후보 경선 패배 이후 민주당 내에는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시민이 이토록 참여를 갈망하는데 그 변화의 주체가 민주당이 아니라는 현실이 서글프다. 한나라당의 실정에만 기대어 내년 총선을 준비해온 것은 아닌가 자기반성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20∼30대 민심을 담아내려는 ‘네티즌 비례대표’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인터넷에서 네티즌이 배심원단으로 참여하는, 즉 ‘슈퍼스타K’ 같은 방식으로 네티즌 비례대표를 뽑아 이들을 비례대표 당선권에 배치하자는 얘기다.
당 고위 관계자는 “네티즌 10만 명의 추천을 받아 권역별 4∼5배수로 후보자를 선출한 뒤 인터넷 토론에서 이를 검증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현실성을 떠나 ‘늙은 정당’으로 전락하는 민주당의 위기 상황에 대한 절박감이 그만큼 큰 것이다.
민주당 주도의 야권 통합 논의도 ‘신뢰 위기’에 봉착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소수 야당 간 화학적 결합이 난관에 부딪힌 상황에서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함에 따라 야권 통합을 주도적으로 이끌 동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 일부 의원은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처럼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른 정당과의 통합은 득보다 실이 많고 시간적으로도 어렵다”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그 대신 정책적 편차가 크지 않은 국민참여당과 이해찬 등 당 외곽 친노(친 노무현) 인사를 대상으로 한 ‘선도 통합론’이 고개를 드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위기 탈출 ‘해결사’ 절대 필요
사퇴 선언 하루 만에 당무에 복귀한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10월 5일 오후 국회 본청 당대표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난마처럼 얽힌 민주당에 ‘해결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자연히 시선은 ‘혁신과 통합’ 공동 상임대표인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쏠린다. 당 대표 사퇴 파문은 정통 민주당 지지층으로 하여금 ‘손학규 대안론’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정동영, 정세균 최고위원 역시 아직은 손 대표를 대체할 만한 대선주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문 이사장의 활동 반경이 한층 넓어졌다. 때마침 정치인 문재인의 영향력을 테스트할 시험무대가 열린다. 바로 10·26 부산 동구청장 재선거다. 초반 판세도 나쁘지 않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이해성 민주당 예비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확정함에 따라 한나라당과의 일대일 대결이 가능해졌다. 문 이사장은 이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후원회장을 맡을 예정이어서 자연스레 부산 동구청장 재선거는 문 이사장이 정치 일선에 데뷔하는 첫 무대가 됐다.
한나라당의 아성이던 부산 동구청장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내년 4월 총선에서 부산경남벨트의 총지휘자로 나서 승리를 일궈낸다면 문 이사장이 야권의 강력한 대권후보로 급부상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야권 통합을 내부에서 추동할 동력도 없고, 박근혜 대항마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문 이사장은 기울어가는 민주당을 단숨에 일으켜 세울 ‘양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친노 그룹은 연말 전당대회에서 한명숙 전 총리를 당 대표로 내세울 채비를 서두른다. 문재인과 한명숙으로 이어지는 친노 라인이 다시 민주당 전면에 포진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