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렵하고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홍릉의 사각 장명등.
서오릉은 원래 세조의 큰아들인 추존왕 덕종과 그의 인수대비 한씨의 능인 경릉이 조성되면서 조선 왕실의 왕릉군 가운데 두 번째로 큰 곳이 됐다. 덕종은 세조의 원자이며 왕세자인 의경세자다. 세조는 세자가 일찍 세상을 뜨자 많이 애석해하며 친히 이곳에 나와 길지를 선택했다고 한다. 경릉 이후 이곳에는 덕종의 아우 예종과 그의 비의 창릉이 조성됐고, 200여 년 뒤 제19대 왕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이 먼저 조성되고, 이후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이 조성됐다. 그리고 30여 년 뒤인 영조 33년(1757)에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의 홍릉이 조성되면서 서오릉이라 이름 붙여졌다.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시아버지인 숙종과 그의 시계모 인경왕후, 작은 시어머니 두 분을 모셨고, 숙종의 계비였다가 폐비가 된 대빈 장희빈의 묘소가 1970년대에 천장해온 뒤로는 시부모 다섯 분을 모시는 셈이다. 지금도 시부모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죽어서도 시집살이에 시달리는지 궁금하다. 우허제(右虛制) 자리를 비워놓고 영원히 떠난 남편 영조를 한탄이나 하지 않는지….
정성왕후 우측 유택 여전히 비어 있어
능침이 있는 곡장 안 오른쪽 왕의 자리가 비어 있고 왼쪽에 정성왕후의 능침이 보인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704년 13세에 연잉군(후에 영조)과 가례를 올려 왕실에 들어왔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 봉해졌고, 1757년 승하할 때까지 34년간 왕비로 있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애를 태웠으나 왕비로서 책무를 충실히 하고 권위를 누리다가 1757년(영조 33년) 2월 15일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로 승하했다.
홍릉은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일반적인 능역이 자좌오향(子坐午向), 즉 남향인 데 반해 이 능은 동남에서 북서를 바라보는 흔치 않은 좌향을 택한 것이다. 다른 능역에 비해 사자와 생자의 만남의 공간인 제향 공간과 절대적 사자의 공간인 능침 공간의 높낮이에 차가 큰 것도 특이할뿐더러 경사 또한 매우 가파르다. 게다가 능역은 용맥이 길게 흘러내리는 유란형(乳卵形)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짧다. 영조가 이곳을 자신의 수릉으로 잡은 것이 의아할 정도다.
정성왕후 발인 때 영조는 사대문 안에서 작별을 하고, 사도세자는 호읍(號泣·목 놓아 큰 소리로 욺)하면서 따라오다 모화관(서대문 밖)에서 곡을 하며 하직했다.
34년간 왕비, 자식 없어 애태우다 승하
홍릉은 정자각에서 능침까지 이어지는 능역이 매우 짧고 급경사인 것이 특징이다.
능침이 있는 3면의 곡장 안에 오른쪽 왕의 자리가 비어 있어 평지를 이룬다. 그러나 석물의 배치는 쌍릉 형식이다. 망주석 1쌍, 문무석인 각 1쌍, 혼유석은 왕비의 것 1좌만 왕비의 능침 앞에 있고 장명등은 가운데 1좌가 있으며, 석마, 석양, 석호가 각각 2쌍씩 있다.
(위)투구와 갑옷에 다양한 문양과 장식을 새겨 넣은 홍릉의 무석인. (아래)무석인의 갑옷 등 부분에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돼 있다.
수십m 급경사의 사초지 아래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왼쪽에 예감, 오른쪽 뒤편에 산신석이 있다. 비각에는 영조가 친히 내린 왕후의 시호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를 새겼다. 이렇게 존호가 길어진 것은 정성왕후가 43년의 긴 궁궐 생활을 하면서, 무수리 출신인 시어머니 숙빈 최씨로부터 폐비 희빈 장씨,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계비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등 왕실 어른을 잘 모시고 풍파에 휩쓸리지 않으며 왕실 살림을 잘해냈다는 행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조는 왕비가 승하하자 곡진한 심정으로 그의 행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0여 년간 늘 미소 띤 얼굴로 과인을 맞아주었고 왕실의 두 어른을 극진히 받들어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으며, 과인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에 기울인 정성 또한 지극하여 고마움에 답하고자 이 글을 쓰노라.”
정성왕후는 국모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 같다.
정자각 앞 참도를 중심으로 왼편에 수복방 터가 초석만 남아 있고 오른편에는 수라간 터의 흔적이 있다. 수라간 뒤편 언덕 너머 재실이 있었다고 문헌에 전해지나 현재는 없다. 발굴과 복원이 아쉽다. 제례 때 쓰던 어정(우물)의 흔적도 있다.
정성왕후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대신 영조는 빈과 귀인에게서 2남 12녀를 두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진종 추존, 정조의 양부)가 장자이며, 사도세자(정조의 친부)가 둘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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