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코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예담/ 253쪽/ 1만 원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선인(仙人)처럼 긴 수염을 한 남자가 목욕탕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양치질을 끝내고는 목욕탕 마루 밑으로 숨어버렸다. 그래서 한번은 일부러 낮에 집에 가보았더니 그 남자와 아내는 식탁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어쩌다 쉬는 날에 안아 올리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내 품에서 벗어나려 용을 쓰던 아이는, 그 남자가 안아 올려 뺨을 비비니 활짝 웃었다. 하긴 나는 늘 아들의 자는 모습만 봤다.
아내에게 전화로 ‘배신’을 따지자 아내는 “그 사람은 옆에 있어준단 말이야”라고 토하듯 말했다. “당신과 아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느라고 함께 있지 못한다”고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이런 항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부양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한다. 얼핏 듣기엔 일리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가족이 된 거야? 함께 있고 싶어서 가족이 됐는데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함께 있지 못하다니,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모순된 말이 어째서 통용되는 거야? 그래서 난?”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퍼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내는 다시 뭔가를 결심한 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우리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 한 사람의 회사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가정에는 월급만 갖다 주면 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이제 우리한테 남편도 아니고 아빠도 아냐!”
다음 날,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귀가했다. 아내는 현관 열쇠를 아예 통째로 바꿔버렸다. 나는 졸지에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다. 할 수 없이 역 앞으로 가 그곳을 아지트로 삼은 한 노숙자에게 내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열한 번째로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다른 아홉 명은? 모두가 마루 밑으로 들어갔단다.
최근 10년 동안 수도권에 주택 단지가 생길 때마다 나 같은 일을 당한 남자가 속출했다고 했다. 집이 완성되기 직전에 마루 밑으로 들어가 어느 가족이 이사 올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다가 혼자 내버려진 부인을 슬슬 구슬려 그대로 집을 빼앗아버리는 것. 하지만 나는 마루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다. 아직 회사라는 기댈 곳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마루 밑 남자’에 실린 표제작의 줄거리다. 불황에 회사에서 잘릴까 봐 가정을 팽개친 채 전쟁 치르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샐러리맨의 비애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이 책에는 표제작 외에도 지사에서 본사로 전근 온 것처럼 꾸며 회사로 잠입한 중년의 말단 사원이 비정한 술수가 난무하던 회사를 파산시키는 ‘튀김 사원’, 거품 경제가 가라앉고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희생된 여성 직장인들이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전쟁을 선포하는 ‘전쟁관리조합’, 파견 사장 1개월 무료 체험 이벤트에 따라 새로운 사장을 연이어 맞이했던 한 디자인 회사가 결국은 파견회사에 회사를 빼앗기는 ‘파견 사장’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런 작품은 그야말로 인생의 비애를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소설에서는 바로 내 이야기 아니야, 하는 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발한 발상이 무척 재미있을 뿐 아니라 간결한 문장과 깔끔한 번역이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는 가치 있는 삶과 가족과 회사 동료, 친구를 비롯한 가까운 이들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