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뒷줄 맨 오른쪽)과 함께 6월 12일 오후 남아공 포트 엘리자베스 넬슨만델라베이 경기장에서 펼쳐진 한국 대 그리스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6·2지방선거에서의 한나라당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내놓은 그가 다시 축구인으로 돌아섰다. 그는 대표직을 떠난 뒤 곧바로 2010 월드컵이 열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날아갔다. 대외적인 목적은 두 가지. 하나는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으로 한국 대표팀의 선전을 독려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의 위치를 활용해 2022년 월드컵 한국 유치를 위한 스포츠 외교활동에 나서기 위해서다.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은 정 전 대표가 또다시 축구로 풀려는 노림수로 읽힌다.
2022년 월드컵 개최지는 올해 12월 2일 결정된다. 그때는 정치권에 차기 대선에 대한 논의가 탄력을 받는 시점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첫 단독 월드컵 유치에 성공하면 정 전 대표는 2002년에 이어 10년 만의 대권 재도전에 나설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한나라당의 새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가 7월 14일 열린다. 현재 당내에선 안상수·홍준표 전 원내대표를 비롯, 지도부 경선에 나설 사람들이 잇따라 출마를 선언하면서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 있다. 하지만 정 전 대표는 당내 최대 정치행사인 전당대회를 의식하지 않고 남아공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정치인 정몽준보다 축구인 정몽준의 몸값을 올릴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축구인으로 몸값 올리기 좋은 기회
6월 4일 남아공으로 갔던 정 전 대표는 6월 14일 잠시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 대표팀의 16강행을 결정지을 경기인 아르헨티나전(17일)도 보지 않고 급거 귀국하자 전당대회 출마를 준비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지방선거 전까지만 해도 그의 대표직 재도전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마당에 다시 전당대회에 나올 명분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선거 기획위원장이었던 정두언 의원,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았던 남경필 의원 등이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패배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지도부 경선에 나서자 정 전 대표도 당권 재도전을 위해 귀국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었다.
실제로 정 전 대표의 측근은 “약간의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전당대회에 나서야 한다. 지금 정치 전면에 서 있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오기는 어렵다”며 출마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민심 수습책을 내놓으며 당정청(黨政靑) 세대교체론을 언급한 상태여서 정 전 대표 주변에선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세대교체론이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 대안이 정 전 대표이기는커녕 본인도 ‘유탄’을 맞게 될 것이란 우려였다.
그러나 정 전 대표는 6월 2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방선거가 기대에 못 미친 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전당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또 세대교체론에 대해선 “세대교체는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라며 “정치가 잘되려면 경륜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초선의원도 필요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초선 아니냐”고 말했다. 세대교체론에 비판적인 속내를 드러낸 것.
며칠 후 정 전 대표는 다시 남아공으로 떠났다. 16강전에서 우루과이에 패해 아쉽게 탈락한 태극전사들이 귀국했지만 정 전 대표는 여전히 남아공에 남아 있다. 정 전 대표 측근에 따르면 남아공월드컵 일정이 모두 끝날 때까지 머물 것이라고 한다. 정 전 대표의 생각을 확인하고자 남아공 현지로 연락했으나 수행 중인 측근은 “여기서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그의 뜻을 전해왔다.
현재로선 정 전 대표가 당권 재도전 포기 의사를 철회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당무에서 손을 떼는 대신, 당분간 축구외교에 전념하면서 ‘차기’를 위한 대권수업에 주력할 가능성이 높다. 대권을 노리는 정 전 대표로선 이번 전당대회 출마가 현실적으로 불필요할 수 있다. 한나라당 당헌·당규에 따르면, 당대표가 대선에 나서려면 1년 6개월 전에 대표직을 내놓아야 한다. 대권과 당권을 분리하기 위한 규정이다. 결국 정 전 대표가 대권의 꿈을 접지 않는 한 이번에 당권을 잡더라도 활동할 시간은 1년 정도밖에 안 된다.
특히 새 지도부는 당장 7·28재·보궐선거를 이끌어야 하는데, 이번에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국회의원 재·보선은 8곳에서 실시된다. 이 중 원래 한나라당이 차지했던 지역은 이계진 전 강원도지사 후보가 내놓은 원주 한 곳뿐이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 나선 서울 은평을에서 선전한다 해도 이번 재·보선에서도 여당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당대표는 정치적 타격을 받게 된다.
당권 재도전 포기 암중모색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정 전 대표가 재도전을 포기하고 암중모색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차기 대권을 잡기에 그에게는 한계가 많다. 박 전 대표라는 유력주자가 앞서나가는 상황에서 친이(친이명박)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당내에 세가 거의 없는 그가 후보 자리를 꿰차기는 어렵다. 앞으로 정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현시점에선 친이계가 ‘정몽준 카드’를 채택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다 정 전 대표는 인지도에 비해 지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의 정기 조사에 따르면, 6월 셋째 주 조사에서 대선 예비주자 가운데 정 전 대표의 선호도는 5.6%에 그쳤다. 박 전 대표의 25.9%에는 물론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14.3%), 한명숙 전 국무총리(13.8%), 오세훈 서울시장(9.4%), 김문수 경기도지사(7.8%),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6.7%) 등에도 뒤처져 있다. 그나마 지방선거 직전인 5월 마지막 주 조사에선 정 전 대표가 9.3%를 얻어 김문수 지사(6.9%), 손학규 전 지사(6.0%)보다 앞섰으나 선거 패배 직후 역전됐다.
이런 상황에서 정 전 대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변수 중 하나가 2022년 월드컵 단독 개최 유치다. 아울러 이 대통령이 제기한 당정청 세대교체 바람을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할지도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