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주의에 대한 캐나다인의 긍정적인 평가가 예전만 못하다.
식구들과 갈등 끝에 아크사는 가출해 며칠 동안 친구 집에서 지내다 귀가했다. 아크사가 두 번째 가출을 했을 때 아버지는 딸의 운명을 결정해뒀다. 2007년 12월 집으로 돌아온 아크사를 아버지와 오빠는 준비해둔 칼로 살해하고 바로 앰뷸런스를 불렀다. 아버지는 앰뷸런스를 요청하며 응답원에게 자신이 딸을 죽였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이른바 ‘명예살인(honour killing)’이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요즘도 명예살인이란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가족이나 문중 사람 손에 살해되고 있다. ‘난잡한’ 복장을 하거나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의 혼인을 거부하거나, 동성과 사랑에 빠지는 등의 행위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며, 이런 일을 저지른 가족 구성원을 죽이면 그 명예가 회복된다는 믿음이 중동과 인도 등지에 아직도 뿌리박혀 있다. 주로 여성이 피해자다.
최근 이슬람권 사람들의 이민이 늘면서 캐나다에서도 차츰 명예살인이 문제가 되고 있다. 2006년 이후 3년간 이 유형의 범죄로 캐나다에서 유죄판결이 난 경우가 3건이며, 여러 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다.
캐나다의 다문화주의가 여러 도전을 받고 있다. 명예살인은 극단적 예지만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과 동떨어진 갖가지 소수민족의 관습이 다문화를 면죄부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 이런 튀는 관습은 여러 종교의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경우가 많다.
보편적 가치와 동떨어진 관습들
1990년대 캐나다 연방경찰(RCMP)은 경찰관으로 임용된 시크교도들이 전통에 따라 터번을 쓰고 근무하는 것을 다문화주의 원칙에 의거해 허용했다. 시크교는 인도 북부 펀잡 주가 근거지지만 캐나다에도 그 후예가 다수 거주한다. 시크교 근본주의자들은 터번을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 이를 벗으면 자존심에 중대한 손상을 입는다고 생각하므로 공공장소에서도 늘 착용한다.
경찰관이 정해진 모자 대신 터번을 쓰는 것은 당장 직무수행에 지장이 없어 용인할 수 있다지만,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도로교통 규정으로 정해진 헬멧 대신 터번을 쓸 경우에 단속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 적도 있다. 시크교도들은 과거 조선 여성들이 신변 소품으로 은장도를 지니고 다녔듯, ‘키르판’이라는 작은 칼을 늘 몸에 지니는 전통을 고수한다. 캐나다에 사는 근본주의 시크교 집안의 어린이들은 학교에서도 키르판을 소지한다. 공격용으로는 사용하기 어려운 작은 칼이지만 학생들의 흉기 소지를 교칙으로 금한 학교에서 키르판 단속을 두고 종종 논란이 벌어진다.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도 캐나다에서 논란의 대상이다. 평소에는 다문화주의를 운운하기 이전에 개인의 취향으로 보면 문제 삼을 일이 아니지만 용인하기 곤란한 경우가 왕왕 생긴다. 얼굴 전체를 가리고 눈만 내놓은 여성이 투표장에 나타날 경우 신분증과 대조해 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데 과연 투표를 허용해야 하느냐로 2007년 큰 말썽이 생겼다. 연방선거를 맡은 기관은 결국 다른 두 사람이 동행해 본인임을 보증하거나 몇 가지 신분증을 제시할 경우 투표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연방선거가 아닌 주선거에서는 주별로 입장이 달라 통일된 원칙이 없다.
몬트리올의 한 YMCA회관 옆에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이 운영하는 남자고등학교가 있다. 그런데 YMCA회관 내 운동실에서 여성들이 체조를 하는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 훤히 보인다며 2006년 학교 당국이 YMCA 측에 개선을 요구했다. 학교 측은 운동실에서 바깥은 보이되 바깥에서는 안이 안 보이는 편광유리로 창을 바꿔달라 제의하고 그 설치비 3500달러는 자신들이 부담한다는 의견을 내 상대가 받아들이게 했다. 창이 교체된 사실이 보도되자 현지의 여론이 들끓었다. 요가 동작을 원용한 필라테스(Pilates)가 그다지 선정적이지 않은데도 이것에 문화 충격을 느낀다는 소수민족의 주장을 다 배려해야 하느냐며 성토했다. 결국 YMCA는 도로 종전의 유리창을 달았다.
캐나다의 다문화주의는 일종의 운명이다. 원주민이 주인이던 땅에 프랑스계와 영국계가 들어와 지난 수백 년간 공존했고, 그 뒤로 세계 각지의 소수민족이 이민 와 현재의 캐나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도 이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미국은 유럽계 두 주류민족의 공존 역사가 없다. 더 큰 차이는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데 비해 캐나다는 모국과 거친 갈등 없이 합의에 따라 차츰 독립국이 된 점이다. 비장한 결의로 위험부담을 이겨내고 새 나라를 일군 미국민들은 건국 초기부터 유럽 나라들과 자국만의 색깔, 혹은 국가 정체성에 집착했고 새로 이민 오는 사람들을 이에 동화시켰다.
반면 원주민-영어계-프랑스어계가 공존하고 유럽과 단절한 적도 없는 캐나다는 이민자에게 ‘이것이 캐나다식’이라며 동화시킬 뚜렷한 색깔이 없었다. 따라서 신규 이민자들은 모국에서의 문화를 새 땅에서 그대로 지키며 살았다. 이렇게 각각의 문화집단이 어울려 이뤄진 통합체로서의 캐나다는 일종의 문화 모자이크였던 것이다.
문화집단 격리 vs 다양성 관리
과거 캐나다인은 미국과 자신들의 나라를 비교하며 국가로서 독특한 색깔이 없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여러 이질적 집단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캐나다의 특징이자 장점이며, 다양성은 국가의 귀한 자산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1971년 연방총리 피에르 트뤼도가 문화의 다양성에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용어를 부여하고 이를 국가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다. 이후 그 특징이 더 분명해졌다. ‘하얀 오스트레일리아(White Australia)’를 내걸고 백인우월주의에 집착하던 호주도 1960년대 말 유색인종에게 이민의 문호를 개방했고, 캐나다에 이어 다문화주의를 표방했다. 이런 의미에서 캐나다가 다문화주의 원조(元祖)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문화주의 선언 이후 30여 년간 캐나다인은 이를 자랑으로 여겼고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생각했다. 이런 캐나다 사람들의 인식이 요즘 와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지지가 옛날 같지 않다. 캐나다 주요 여론조사 기관의 하나인 엔비로닉스가 2003년 실시한 조사에서 ‘캐나다인의 정체성(Canadian identity)에 다문화주의가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83%가 동의했다. 지난해 11월 다른 리서치 업체 레거 마케팅의 조사에서는 55%만이 다문화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근 각 정당도 다문화주의를 정책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여러 요인이 이 같은 변화에 기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9·11사태 이후 이슬람권에 대한 서방세계의 경계심, 몇 년 전 프랑스와 호주 등에서 일어난 소수민족의 폭동과 런던의 지하철 폭탄 테러, 그 후 나타난 유럽 각 나라의 보수화 경향 등이 캐나다 내에서의 문화충돌 사례들과 맞물린 것으로 분석된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이자 언론학자인 앤드루 코헌은 각 소수민족이 격리된 채 따로 논다는 점을 들어 다문화주의의 캐나다를 “문화집단의 군도(ethnic archipelago)”라고 혹평했다. 그리고 정치학자 갯 호로위츠는 다문화주의에 관해 “캐나다의 공허함에 대한 자학적 경축(masochistic celebration of Canadian nothingness)”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 나라 주류사회에서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의견도 여전히 힘을 갖고 있다. 사회학자 마이클 애덤스는 “다문화주의는 그 정의가 모호한 탓에 이것이 갖가지 사회악의 근원으로 매도되지만, 이 정책은 소수민족이 이 나라에서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목표인 만큼 궁극적으로 국가의 통합에 도움을 준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강대국이 아니어서 국제무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캐나다가 세계적 전문가라고 자부할 분야가 하나 있다면 바로 ‘다양성의 관리(managing diversity)’”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