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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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백마부대 고귀한 넋이여!

평안도 청년들 6·25 때 큰 활약 … 최초의 ‘기념음악회’ 개최 희생자들 추모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0-07-05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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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격백마부대 고귀한 넋이여!

    6·25를 맞아 모인 유격백마부대 전우회. 전우 상당수는 ‘불귀의 객’이 됐다.

    ‘길 가는 손들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무 살 안팎 젊은 목숨을 반공 구국에 기꺼이 바친 뜻을 새기고 넋을 기려다오.’

    이 한 줄의 문구가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을 산책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음악원 임웅균 교수의 발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어 봤더니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이 당당하게, 하지만 외롭게 서 있었다. 임 교수는 ‘언젠가 이들을 위한 기념음악회를 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2년 후 약속을 지켰다.

    지난 6월 25일, 초여름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던 날. 충혼탑 앞에서 ‘6·25전쟁 60주년 유격백마부대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임 교수와 소프라노 이지은·박지선 씨, 베이스바리톤 이승원 씨 등 성악가들과 한예종 학생들이 가곡 ‘목련화’ ‘그리운 금강산’ ‘비목’ 등을 공연했다. 음악회에는 백마부대 전우들과 유가족 등 100여 명이 참석해 희생 장병의 넋을 기렸다.

    1950년 10월,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던 유엔 연합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철수했다. 백기를 흔들며 유엔군을 반겼던 평안북도 정주군과 박천군 일대 청년들은 두려웠다. 지난 5년간 이미 소련과 김일성에게 시달려온 터였다. 인민군 차출을 거부하고 주변 작은 섬에 숨어 있던 청년들과 정주 오산학교 학생들은 “우리도 힘을 모으자”고 결심했다. 11월 22일 김응수를 부대장으로 한 대원 2600여 명이 ‘유격백마부대’를 조직했다.

    서해 여러 섬에서 정규군 작전 뒷받침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어서 무기도 부족하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막강한 전투력과 물량공세로 공격하는 중공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해 여러 섬에서 정규군의 작전을 뒷받침하며 큰 활약을 했다. 지원이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평안북도 애도와 철산반도 등에서 공산군과 교전을 벌여 300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600여 명의 중공군을 생포했다. 격전 속에서 군번도 없는 552명의 대원이 피를 쏟으며 사망했다.

    특히 백마부대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북쪽 시민 1만8000여 명의 탈출을 도왔다. 중앙일보 정진홍(47) 논설위원은 기념음악회에 참석해 “1951년 초 아버지가 평안남도를 탈출할 당시 섬에서 여러 유격대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중 하나가 유격백마부대였을 거다. 유격백마부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생명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552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으나 변변한 추도식도 하지 못했다.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보상은 바라지 못했고 가족·친지가 모두 북에 있으니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한 작은 섬에서 숨진 전우를 위해 생존 병사들이 손수 쌓은 돌탑 앞에서 첫 추도식을 갖고, 해마다 곳곳을 돌며 추도식을 열었다. 그러다 1992년 월남한 평안북도 출신 유지들과 몇몇 후원자가 힘을 보태 양재동에 충혼탑을 세웠다.

    오산학교 교사 출신인 전제현 전 장군은 “임 교수의 아름다운 노래를 북의 동포와 함께 대동강의 능라도(嶋) 늘어진 버드나무 숲에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애상에 잠겼다. 그 위로, 임 교수가 부른 ‘물망초(Non ti scordar di me)’의 노랫말만이 창창히 울려 퍼졌다.

    “날 잊지 말아라, 내 맘에 맺힌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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