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성남시 청사, 전남도 청사, 용인시 청사
한 전직 기초단체장 A씨의 말이다. 그도 임기 중에 청사를 새로 지었다. 물론 명분은 있다.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연임에 대한 욕심도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말끝을 흐린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피한 채 ‘소탈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IMF 위기 속에서도 신축 행진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들의 호화청사가 연일 논란이 되고 있다. 불을 지핀 것은 지난해 11월 새롭게 문을 연 경기도 성남시 청사. 지하 2층, 지상 9층, 연면적 7만2746㎡ 규모에 총사업비가 3222억원에 달한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대엽 성남시장은 2006년 연임에 성공했고, 이듬해 청사 신축을 추진해 2년 만에 완공했다. 그 과정에서 특혜비리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시장의 친인척이 신청사의 조경공사를 맡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올해 초엔 경기 안양시가 2조2349억원을 들여 100층짜리 초고층 복합건물로 신청사를 세우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해 호화청사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안양시 청사는 지은 지 14년밖에 되지 않는다. 비난여론이 거세지만 이필운 안양시장은 거듭 추진 의지를 밝혔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호화청사 자제를 요청했건만, ‘우이독경(牛耳讀經)’인 셈이다. 결국 감사원이 칼을 들었다. 최근 호화청사 신축 논란을 빚은 지자체에 대한 특별감사에 착수한 것.
사실 지자체 청사 신축을 둘러싼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민선으로 지방단체장을 선출하기 시작한 1995년 이후 빈번하게 제기돼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후 2009년 연말까지 전국에 신축된 청사는 56개에 이른다(1995년 입주한 청사 5개 제외). 지난 14년 동안 246개 지자체(광역 16개, 기초 230개) 청사의 23%, 한 해 평균 4개 이상의 청사가 지어졌다. 이 가운데 광역지자체 청사는 5개이며, 나머지 51개가 모두 기초지자체 청사다. 여기에 현재 18개 청사가 공사 중이거나, 설계 또는 구상 중이다.
행정안전부 집계자료에 따르면, 청사 신축이 절정에 이른 것은 1997년이다. 10개의 지자체가 건물을 준공하고 신청사에 입주했다. 민선 지방자치시대가 열린 지 2년 만의 일이다. 그해 우리나라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간신히 국가 부도위기를 모면했다. 그럼에도 지자체들은 청사 신축계획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1999년 3개, 2000년 4개, 2001년 6개의 지자체가 신청사로 자리를 옮겼다. 2008년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지자체의 청사 신축은 멈추지 않았고, 지난 한 해에만 4개의 호화청사가 화려한 개청식까지 하면서 문을 열었다.
정치·경제적으로 큰 도움?
민선 지방단체장들이 이처럼 청사 신축에 매달리는 까닭은 뭘까. ‘주간동아’는 1995년 이후 청사를 신축한 지방단체장들의 특성을 분석해봤다. 그 결과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청사 준공 당시 지방단체장 56명의 연임 여부를 살펴본 결과, 37명(66.1%)이 재선에 성공했고, 그중 13명(23.2%)이 3선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각각 기초단체장 평균 재선 성공률 38.3%, 평균 3선 성공률 11.3%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청사를 신축한 지방단체장이 초선으로 끝났거나 초선인 경우는 19명으로, 33.9%에 그쳤다. 민선 2~4기 기초단체장 중 초선이 차지하는 평균 비율 54.2%보다 현격히 낮은 수치다. 광역단체장은 기초단체장에 비해 재선이나 3선을 하기 힘들다. 만일 광역단체장까지 포함된 평균치를 적용한다면 청사를 신축한 지방단체장 연임 비율과의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청사를 신축한 지방단체장의 연임 확률이 그렇지 않은 지방단체장보다 높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크다.
청사를 신축한 지방단체장의 경력도 기초단체장 경력 통계와 주목할 만한 차이를 보인다. 이들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공무원이 26명(46.4%)으로 가장 많고, 그 뒤를 이어 정치정당인 10명(17.9%), 상공기업인 8명(14.3%), 광역·기초의원 6명(10.7%), 전문직 4명(7.1%), 시민사회단체 2명(3.6%) 순으로 나타났다.
정치정당인과 상공기업인의 비율이 각각 8.2%와 6.4%에 머문 민선 1~4기 기초단체장 전체 비율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것. 이는 정치정당인이나 상공기업인 출신이 다른 경력자들보다 청사 신축에 적극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좀더 깊이 들어가면 청사 신축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방단체장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도 된다. 참여자치연대 이재근 사무국장의 말은 이 같은 분석결과와 맥을 같이한다.
암암리에 벌어지는 비리 상상 이상
“중소도시에서 관급공사를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공사를 해야 기업에 일정한 혜택을 주고, 커미션도 챙길 수 있을 것 아닌가. 큰 규모의 산업단지는 다른 기관과 연계해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하지만 청사는 지방단체장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진행하기도, 개입하기도 손쉽다. 부수적인 수입도 챙기기 쉽다. 지방단체장은 선거자금 모금도 못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선거비용은 국회의원보다 더 든다. 결국 손쉬운 청사 신축에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청사를 신축하면 단체장이 바뀌면서 뭔가 새로워진 것 같고 치적으로도 남기 때문에 단체장 처지에서는 ‘꿩 먹고 알 먹는’ 게임이다.”
이 국장은 “청사 신축 등 관급공사 비리에는 대부분 해당 지방업자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부도가 나거나 사업을 접지 않는 한 외부로 알려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방단체장의 부패와 가장 많이 관련된 분야는 관급공사 입찰이나 계약에 관한 것이다.
한 예로, 민선 3기 지방단체장 중 부패혐의가 드러난 단체장이 78명이나 됐고, 이 가운데 공사계약과 인·허가 등 직무와 관련된 뇌물수수가 32명으로 가장 많았다. 올해로 임기가 끝나는 민선 4기 지방단체장 자리에서 중도하차한 35명 중 12명의 주요 혐의도 비슷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이 정도라면 청사 신축을 둘러싸고 암암리에 벌어지는 비리는 상상 이상일 수 있다.
한 지방단체장의 고백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처음에 청사를 공모했을 때 많은 사람이 와서 부탁했다. 다른 지자체에서는 이미 업자를 다 정해놓고 한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산이 2000만원 이상 들어가는 모든 공사를 조달청을 통해 공개경쟁 입찰방식으로 진행했다. 아마도 관할 국회의원이 깨끗한 덕분이 아닌가 싶다. 지방단체장의 돈으로 당선되는 국회의원이 적지 않은데, 나는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솔직히 기초지자체를 꾸려나가는 데 돈 들어갈 일은 별로 없다. 청사를 신축하는 게 가장 큰 공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