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2월22일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열린 대전·충남지역 인사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세종시 원안 수정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다.
12월22일 이명박 대통령은 세종시 원안 수정 논란에 대한 자신의 ‘무한 책임론’을 언급했다. 대전을 방문해 충청권 인사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 자리에서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총리로 내정된 당일 ‘세종시 원안 수정’을 공론화하는 바람에 고향인 충청에서 지탄의 대상이 됐으나, 이 모두가 대통령의 책임 아래 이뤄지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20%대 후반서 40% 중반까지 상승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이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2010년 1월11일 발표될 예정인 수정안이 충청권 주민은 물론, 국민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다. 집권 3년차 진입을 눈앞에 둔 이 대통령은 최근 들어 세종시 문제뿐 아니라 국정운영 전반에 걸쳐 강한 의욕과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집권 전반기에는 모든 여건이 좋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따른 촛불시위,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자살 등으로 우울한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2009년 8·15 경축사에서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을 표방하고 현장을 찾는 국정운영에 나서면서부터 모든 상황이 좋아졌다. 경제회복 추세는 세계가 놀랄 정도고, G20 정상회의 유치라는 외교적 성과도 일궜다.
그동안 마신 쓴 약이 보약이 되는 사이에 지지층도 다시 결집했다. 수도권 거주자, 중산층, 40~50대, 화이트칼라로 대표되는 MB 지지자들은 집권 중반기에 접어든 이명박 정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꾸준히 반등하는 데서 확인된다.
대선 승리 2주년인 지난 12월19일을 전후해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은 40% 중반대의 지지율을 이끌어냈다. 5년 전 노 전 대통령이 20%대 후반~30%대 초반에 그친 것과 비교된다. 특히 지난 2년간 이 대통령의 지지도는 과거 정권과 달리 ‘U자형’ 커브를 그렸다. 지난해 촛불시위 때 20%대까지 추락했다가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을 표방한 이후 집권 초기 수준으로 반등했다.
이 대통령은 국정운영 지지도 추이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촛불시위 때 ‘퇴진론’이 나올 정도로 민심이 악화됐던 악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지지도가 호전되자 국정운영에 탄력을 붙였다.
사실 세종시 원안 수정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마련한 국정과제였다. 당초 집권 초반 추동력이 있을 때 밀어붙일 계획이었지만 촛불정국에 밀려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전반적인 여론 호전에 힘입어 뒤늦게 공론화에 나선 것이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이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로 집권 3년차에 접어드는 시점에 또 한 차례 큰 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하는 견해가 많다. 심지어 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반대에 밀려 원안 수정을 관철하지 못할 경우 순식간에 레임덕에 빠질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세종시 원안 수정이 박 전 대표에게 ‘꽃놀이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대통령에게도 불리한 카드만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한나라당 중진의원은 “1월11일에 어떤 대안이 나오더라도 새로운 분란이 일어나면서 관련 법 개정을 위해 공이 국회로 넘어올 것”이라며 “국회에서 수정안이 무산되면 그것은 국회의 책임이지 대통령의 책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권의 다른 관계자는 ‘입찰론’이라는 이색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건설회사는 대형 공사를 따내기 위해 입찰경쟁에서 최선을 다하고, 실패할 경우 깨끗이 포기한 뒤 다른 입찰에 도전한다. 이 관계자는 “현대건설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이 대통령도 지금은 세종시에 올인하다시피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미련 없이 털고 새로운 국정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이기 때문에 레임덕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절충과 타협 여지는 안 보인다?
12월16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금융·기업 분야 정부부처 업무보고에 참석한 정운찬 총리(앞)와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원칙론”이라고 설명하지만, 집권 중반기의 안정적 국정운영과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사회 기강 잡기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야당이 한 전 총리 수사를 놓고 정치탄압이라고 반발하는 데 대한 경고 메시지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12월24일 “전체 예산의 1.2%에 불과한 4대강 사업 예산을 문제 삼아 예산안 처리를 하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야당을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집권 3년차를 앞둔 이 대통령의 자신감은 최근 출범한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에 고건 전 국무총리를 발탁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고 전 총리는 3공화국 시절부터 공직을 지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서울시장과 총리를 역임한 ‘과거 정권 인물’이다. 2007년 대선 때 민주당의 대선 후보 영입 대상자이던 정운찬 총리 기용에 이은 파격 인사인 셈. 고 전 총리가 MB 정부 참여를 결정한 것 자체가 이 대통령이 집권 안정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밖에 4대강 사업 강행이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 처리 과정, 청와대가 내년 초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등 기업인에 대한 특별사면 및 복권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점 등도 이 대통령의 자신감을 반영한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국정운영 마인드는 여권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12월20일 심야에 열린 고위 당·정·청 회동 결과가 그 단적인 사례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 정운찬 국무총리, 정정길 대통령실장 등 여권 수뇌들이 모인 회동에서는 세종시, 4대강 사업, 노조법 등 연말 정국의 3대 현안을 사실상 기존 방향 그대로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야당과의 절충이나 타협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 대통령의 이런 ‘정면 돌파’ 기조 때문에 정국이 더 꼬일 것이란 우려도 없지 않다. 가뜩이나 세종시와 4대강 사업 예산으로 뒤숭숭한 마당에 청와대가 강경 드라이브로 일관하면 집권 3년차의 안정적 국정운영에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란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