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뚝뚝한 첫인상과 달리 허를 찌르는 입담 덕분에 주변 사람들 사이에 ‘재미있는 사람’으로 통한다. 장 과장은 “처음 만난 상대에게는 분위기 파악을 위해 잠시 ‘진중 모드’를 보이지만, 곧 그 사람의 특징과 성향을 간파해 ‘맞춤식 유머’를 구사하다 보니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고 했다.
# 외국계 회사에서 엔지니어, 마케터 등으로 근무한 회사원 엄모(32) 씨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남다른 ‘예능 감각’으로 인기가 많았다. 최신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패러디하고, 여성이면서도 ‘몸 개그’를 서슴지 않는 것부터가 비범하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남을 웃기기도 잘하지만 오버 액션을 하면서까지 남의 말에 크게 반응하고 즐거워해주기 때문에 더 편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엄씨는 “스스로를 웃음의 소재로 삼아, 코믹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치부’를 잘 드러내는 편인데 이렇게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장점은 ‘한 다리 건너’ 인연을 쌓는 데 능하다는 것. 특유의 친화력으로 우연히 만난 ‘친구의 친구’ ‘친구 회사의 상사’ ‘동료의 대학동창’까지 자신의 네트워크로 섭렵한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또 ‘창의적인’ 방법으로 남들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머 감각과 말재주를 단순한 ‘센스’가 아닌 ‘능력’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취업, 결혼 등 인생의 중요한 관문마다 이러한 남다른 감각, 즉 ‘예능력’을 갖춘 이들이 핵심 인재로 여겨지게 된 것.
‘재미있고 센스 있는 사람’이 최고
서인영, 김태원, 황정음 등의 예에서 보듯 ‘그냥’ 가수 또는 탤런트이던 연예인이 예능·오락 프로그램 하나로 일약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이변도 속출하고 있다. 이들이 활약하는 프로그램이 안방을 장악해 예능 전성시대를 이루고, 연예인이나 일반인 모두에게 ‘예능력’이 하나의 비범한 능력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재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후 사람들은 재미를 추구하는 데 집중하게 됐는데 이러한 추세가 마침 발맞춰 성장한 TV방송, 인터넷 등 미디어의 힘을 받으며 나날이 확대 재생산됐다는 설명이다.
건국대 의대 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요즘은 이성 관계에서도 잘생긴 사람보다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시대”라며 ‘예능력’을 갖춘 사람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대화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날릴 수 있는 맥락 파악 능력을 갖췄고 △‘말 비틀기’를 잘하고 다른 사람 흉내를 잘 내는 언어능력과 관찰력을 지녔으며 △사전 대본이 없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처럼, 웃길 내용을 준비해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반응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있고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며 웃음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중재자적 역할에 강하다.
이처럼 현대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적합한 기질 덕분에 ‘예능력’은 면접 때도 빛을 발한다는 것이 헤드헌터와 각 기업 인사담당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사장의 비밀’ 저자인 ‘MPR · 커뮤니케이션즈’ 최진택 대표는 “같은 질문을 여러 면접 대상자에게 반복하는 상황이라 면접관들도 피로를 느낀다. 이럴 때 센스 있고 유머러스하게 답변하는 지원자에게는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특히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획기적인 신상품 또는 서비스의 개발’을 각 기업들이 지상과제로 내건 상황에서 이렇게 ‘예능력’을 갖춘 사람이 창의성 또한 높으리라 기대하게 된다는 것. 또 ‘예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도 높다는 것이 최 대표의 설명이다.
“이들은 자신을 통해 상대방이 즐거움과 행복을 느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또 외부에서 각종 갈등 상황을 무리 없이, 부드럽게 해결해낼 수 있습니다.”
한편 취업정보업체 ‘잡코리아’의 황선길 컨설팅사업본부장은 공기업 신입사원 채용 인터뷰 면접관으로 참여한 경험을 들려줬다.
“다들 출신학교, 학점, 공인 점수 등 소위 ‘스펙’은 대단했는데 틀에 박힌, 딱딱한 답변만 늘어놓아 과연 이런 사람들이 친절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첫인상은 ‘범죄형’에 가까운 한 지원자가 시종일관 서글서글하고, 위트 있게 답하는 모습을 보여 면접관들이 만장일치로 좋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예능력’은 현대인의 생존무기
황 본부장은 이처럼 ‘예능력’을 갖춘 인재를 각 기업이 선호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산업 패러다임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에서는 묵묵하게, 오차 없이 일하는 ‘돌쇠형’ 인재가 각광받았다면 지금은 기획, 마케팅 부서뿐 아니라 기술, 영업 관련 부서에서도 튀는 발상과 아이디어로 가득 찬 ‘예능형’ 인재를 찾고 있다”며 “이는 제품과 서비스에 인간적인 감성을 불어넣는, ‘감성’과 ‘소프트웨어’가 화두가 되는 산업 트렌드의 변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 본부장은 우리나라 기업 환경에서 ‘예능력’이 주목받기 시작한 ‘원년’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을 꼽았다. 이때부터 수평적 문화를 근간으로 한 외국계 기업의 정서가 국내 기업으로 빠르게 유입됐고, 윗사람 눈치 보느라 감히 ‘예능력’을 표출하지 못했던 직원들이 회의, 프레젠테이션 문화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펼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에선 이른바 ‘예능력자’들을 ‘실없이 웃긴다’ ‘만만하다’ ‘싱겁다’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조직이 수평적으로 변하면서 이들의 ‘소프트 파워’가 능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진택 대표 역시 사내에서는 ‘상명하복’, 사외에서는 ‘갑과 을’의 질서가 뚜렷했던 과거와 달리 조직 내에서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 외부에서는 ‘파트너십’이 강조되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의 변화가 ‘예능력’을 빛나는 인재 요건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명령형 또는 지시형보다는 화합형 인재가 돋보이면서 ‘예능력’을 갖춘 이들의 공통적인 장점, 즉 조화로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주목받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직원뿐 아니라 사장 등 기업 임원들도 ‘예능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는 분위기다. 한국유머전략연구소 최규상 소장은 최고경영자, 전문직 종사자를 중심으로 유머 코칭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송년회나 신년회 때 직원들을 대상으로 3~4분간 스피치를 해야 하는데 위트 있게 말하고 싶다’ ‘평소 말을 좀 재미있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이들을 대상으로 상황 또는 상대에 맞는 ‘유머 공략법’을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같은 사회 지도층급 인사들이 구사하는 유머러스한 스피치가 각광받으면서 이러한 수요는 더욱 증가하는 추세다.
직원도 사장도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활용
최규상 소장이 조언하는 ‘예능력’ 향상 기법은 이른바 ‘감·상·실 이론’. 그는 “민감한 ‘감수성’을 발휘해 일상생활의 평범한 상황을 유머 소재로 끌어내고, 각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며 재미있는 말들을 실제로 용기 있게 내뱉는 ‘실험정신’을 기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지난해 펴낸 저서 ‘세상을 가지고 노는 힘, 유머力’에 이어 최근 ‘긍정力 사전’도 펴냈다.
“유머력이나 긍정력, 예능력 모두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남들과 잘 어울리고 싶고,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만 갖췄다면 누구나 ‘예능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예능력’ 전성시대.
당신의 ‘예능력’은 극복해야 할 ‘걸림돌’인가, 아니면 하늘을 날게 할 ‘도약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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