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Untitled’(Golden), 1995, Photo by David Heald.
“아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슬발이 작품이라고?”라며 의아해할지도 모를 이들을 위해 이전 작업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갤러리 한구석에 비닐로 싼 사탕을 소복이 쌓아놓고 관객들이 껍질을 까 실제로 먹게 했습니다. 그러면 사탕은 점점 줄어들겠죠. 그런데 작품은 ‘무제’라는 제목에 ‘로스는 더 많이’(Untitled, Rossmore, 1991)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요. ‘사탕을 쌓아놓은 게 작품이라고? 나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로스는 또 뭐야?’라고 생각하겠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토레스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고, 평생 그 주제에 매달렸습니다. 달콤한 사탕은 입에 넣는 순간 녹아 없어지고, 구석에 쌓아놓은 사탕 무더기는 어느새 텅 빈 공간만을 남깁니다.
그런데 사탕이 없어지는 동안 작가에게 ‘로스’는 더 많이 생각납니다. 로스는 당시 에이즈로 죽어가던 토레스의 동성 연인으로,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연인의 모습을 보는 건 작가에게 큰 고통이었을 겁니다. 사탕의 달콤함과 그것의 사라짐은 짧은 인생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또 ‘작품을 만지지 말라’는 암묵적 금기를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깨게 함으로써, 사회적 금기나 편견에 맞설 것을 요구합니다.
1996년 에이즈로 사망하기 전, 토레스는 붉은 구슬로 발을 만든 작품 ‘무제-피’(Untitled, Blood, 1993)를 선보였는데요. 관객은 핏빛의 발과 접촉하면서 피, 접촉, 감염, 죽음의 은유를 촉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특히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그것을 기억하는 내가 구별되지 않을 만큼, 즉 내 몸 안에 피처럼 스며드는 상태를 말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미 죽은 연인 로스가 그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던 작가는 죽기 직전 영원을 상징하는 금빛으로 자신의 작품을 마무리했습니다. 어쩌면 죽음이 사회적인 편견과 개인적인 아픔으로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삶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울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요? 플라스틱 구슬이라는 값싼 재료와 그 위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빛. 토레스의 작품 ‘Untitled’(Golden)를 지나가는 순간 관객들은 어쩌면 남루한 일상과 영원한 안식, 삶과 죽음 사이를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대적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곳은 바로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 게 아닐까요. 아주 얇은 하나의 발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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