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전경을 남산 꼭대기에서 파노라마로 찍었다.
유순희
저녁 7시 숙희, 순희 씨 가게는 가로등 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빛났다. 걸게 놓인 안주발에 소주가 절로 익는다. 입에 착 달라붙는 안주 베어 물면 밤도 익어간다. 이 먹자골목은 중구에서 밥을 버는 보통사람들의 포근한 쉼터다.
소주잔이 오가는 통나무집은 복닥복닥했다. 김광태(50) 씨는 “비도 오는데 머리고기나 씹자”며 친구들을 꼬드겼다. 친구(김진선 씨·49)한테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혼자 힘든 척한다”는 나무람을 듣고는 “머리고기가 잘 삶아졌다”며 웃는다.
정동의(51) 씨는 광고전단지를 찍어 판다. 충무로에 인쇄소를 연 지 17년. 망치, 칼로 전단지 수백 장을 한 번에 자르는 솜씨가 멋지다. 20평 남짓한 ‘동진사’엔 인쇄기가 2대 있다. 배우 뺨치는 방글라데시 청년이 인쇄기를 돌린다.
충무로 ‘명동카메라’에서 일하는 김일구(45) 씨는 20년 넘게 카메라만 들여다봤다. 사진이 좋아 카메라가 밥벌이가 됐다. 1500만원짜리 ‘라이카’를 꺼내놓는 표정이 의기양양하다. “아날로그는 충무로에 남고, 디지털은 남대문으로 떠났다”고 그는 말했다.
충무로 골목은 퇴락했다. 영화사도 하나 둘 이곳을 떠났다. 그럼에도 충무로는 장인과 예술가의 거리다. 그들이 고기 구워먹던 ‘황소집’, 소주 들이켜던 ‘초막집’은 문을 닫았지만 1960년대부터 한정식을 팔아온 ‘대림정’은 남았다.
충무로 서쪽 끝자락엔 신세계백화점(충무로1가)이 섰다. 1930년대 근대 건축물과 21세기 현대 건축물이 마주 본다. 이 백화점의 구관과 신관(2007년 개관)엔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엉켜 있다. 구관은 모던보이가 누비던 1930년대 미스코시백화점(경성지점)이 모태다.
“진열장 앞에 오기만 하면 이 유행균의 무서운 유혹에 황홀하여 걸음 걷기를 잊고 정신이 몽롱해지며 다 각각 자기의 유행 세계를 설계하려 든다.”(‘만추가두풍경’/ 최영수/ 1937년)
# 모던의 열정, 모던의 눈물
정동의(왼쪽), 김일구
중구엔 특급호텔이 10개 있다. 1·2·3등급을 합치면 관광호텔은 20개가 넘는다.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중앙시장(포장마차 음식의 식자재로 유명하다)도 중구에 있다. 중앙시장의 곱창 지린내는 맡아본 사람만이 그 매력을 안다. 70년 넘게 꼬리를 고았다는 ‘은호식당’(남대문시장)의 토막 낸 꼬리 맛은 달다.
중구는 소공동 회현동 명동 필동 장충동 광희동 신당동 황학동 중림동 등 15개 동으로 이뤄졌다. 남쪽은 조선왕조 때 목멱(木覓)산이라 불리던 남산으로 막혔고, 북쪽은 청계천을 경계로 종로구와 맞닿는다. 면적은 9.96km2, 인구는 13만7000명(2007년 현재).
충무로국제영화제(9월3~11일)가 열린 충무로에서 영화는 축제고, 축제는 곧 영화다.
1971년까지 소공동엔 중국인이 살았다. 산둥성(山東省) 출신으로 대만 여권을 가진 화교가 많았다. 중국인들은 71년 소공동에서 쫓겨난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첨병이던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을지로2가, 1926년 12월28일 나석주 선생이 폭탄을 투척한 황금정 2정목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그곳이다) 뒤뜰에 임시 수용됐다가 흩어졌다.
중국인들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밀려난 자리에서 1973년 12월 호텔 기공식이 열린다. 79년 롯데백화점이 개관하면서 소공동은 우뚝 섰다. ‘모던의 경성’이 ‘대망의 1980년대’에 터를 내준 것이다.
일제가 지은 건물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차례로 스러졌다. 경성의 흔적으로는 중구에서 경성부청(서울시청), 경성부민관(서울시의회), 광통관(우리은행 종로지점), 조선은행(한국화폐박물관), 미스코시백화점, 명동성당, 조지야 백화점(롯데백화점 영플라자), 경성전기(남대문로 한국전력사옥)가 살아남았다.
중구는 일제에 의해 헐리고 새로 지어지면서 근대를 맞았고, 1971년 도시계획법 개정으로 다시 헐리고 새로 지어졌다.
중구는 루이비통의 화려함과 시장통의 소박함이 부조화의 조화를 이룬다.
2002년 대통령선거 후보 초청토론회 때의 일이다. 한 패널이 이회창 당시 후보에게 물었다.
“한인옥 여사가 이회창 후보는 양복이 두 벌 있는데 세일할 때 산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양복이 몇 벌이고 얼마짜리를 입느냐?”
“잘 모른다.”(이 후보)
“그럼 지금 입은 양복은 어느 회사 제품이냐?”(패널)
“20세기라고 되어 있는데….”(이 후보)
1930년대 모던걸을 달뜨게 한 쇼윈도의 ‘유행균’은 지금도 오가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롯데백화점이 서고, 맞춤양복이 잘나갈 때 명동은 눈부셨다.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린 일제강점기부터 돈이 모이는 꼭짓점. 그러나 21세기 명동은 값싸게 소비된다. 증권, 채권은 여의도에 내줬고 패션, 트렌드는 강남에 넘겼다. ‘명동돈까스’의 맛은 그 시절 그대로다. ‘명동교자’(옛 명동칼국수)는 예전만 못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만두를 팔던 ‘취천루’는 3대째 70년간 만두를 빚어왔다.
충무로의 좁고 지저분한 뒷골목은 장인의 거리다.
결혼식장과 식당으로 쓰는 ‘한국의 집’(필동)은 집현전 학자이던 박팽년의 집터다. 미국에 사는 이윤원(32) 씨가 백년가약을 맺는다. ‘한국의 집’에서 5만5000원짜리 갈비찜을 먹는 프랑스인의 젓가락질은 능숙하다. 저녁 7시, 남산골 한옥마을에 울려퍼지는 퓨전 국악이 아름답다. 아쟁, 해금, 개량 가야금(25현)으로 라틴음악을 선보인 연주자들의 얼굴은 예쁘다. 조선왕조 때 남산골엔 쇠락한 양반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수표교는 1420년(세종 2년) 관수동과 수표동에 놓인 조선의 다리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남산공원)으로 옮겼다. 장충동은 근현대사의 비극을 응축한다. 장충단은 초혼단(招魂壇).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훈련대 장병을 제사 지내던 곳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전후로 노래된 한양가(漢陽歌)의 한 대목이다.
한옥마을의 국악 선율이 아름답다(왼쪽). 명동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는 ‘공용어’라 할 만하다.
인현시장은 보통사람들의 포근한 쉼터다(왼쪽). 동대문은 값싸게 소비되면서도 포스트모던하다.
전숙렬
연합뉴스 부국장을 지낸 송영찬(63) 씨는 야구광이다.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나 중구 광희동에서 자랐다. 그는 1950년대 장충단공원에서 배트를 휘둘렀다. 애창곡은 고(故) 배호(1942~71년) 씨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1967년). 고 김기수(1941~97년) 씨가 장충체육관에서 첫 한국인 세계챔피언으로 오른 날(1966년 6월25일)이 또렷하다. 지긋한 서울내기들에게 남산 턱밑은 성장기의 추억을 상징한다. 송씨가 글러브를 끼고 뛰놀던 맨땅은 2007년 5개월 동안의 공사를 거쳐 인조잔디로 얼굴을 바꿨다.
장충동은 족발로도 유명하다. 누가 원조인지 족발집 주인들도 모른다. ‘뚱뚱이할머니집’ 전숙렬(81) 할머니는 51년째 족발을 삶았다.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1946년 월남했다. “장충동 족발이 왜 맛있느냐”고 물었다. “잘하니까 맛나겄지. 비법이 있으니까 맛나겄지.”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할머니는 “며느리한테만 살짝 일러줬다”며 웃었다.
‘뚱뚱이할머니집’에서 길을 건너면 태극당(太極堂)이 나온다. ‘菓子 중의 菓子’를 구워 ‘창업 이래 같은 맛과 모양으로 서비스하는 곳’이라고 적혔다. ‘캔듸’라고 쓰인 봉투엔 박하사탕이 가득하다. 오래된 스타일의 빵은 달았다. 1946년 충무로에서 문을 열어 73년 장충동으로 이사 왔다. 사진기자가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가 “필름을 빼앗겠다”는 엄포를 들었다. 신문, 방송, 잡지를 타지 않는 게 ‘아흔 넘은 회장님’의 방침이란다.
중구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떡볶이를 빼놓기 어렵다. 신당동에서 ‘마복림할머니집’ ‘아이러브떡볶이’를 고르면 후회 없다. ‘진주회관’(서소문동)은 콩국수, ‘안경할머니집’(황학동)은 곱창이 맛나다. ‘오모가리’(초동)의 김치찌개도 먹어볼 만하다. ‘속초생태집’(북창동)은 생태탕으로, ‘충무로돼지갈비’(충무로3가)는 일본인한테 소문났다.
# 컬처노믹스,쪽빛 미래를 꿈꾸다
동대문패션가
1970년대에 왜색을 뺐다면 지금은 하늘을 지향한다. GS건설은 충무로4가에서 지하 7층~지상 32층 규모의 주상복합아파트 ‘충무로자이’를 짓는다. 중구 쪽 세운상가엔 마천루가 구상된다. 대만 타이베이의 ‘101빌딩’과 두바이의 ‘버즈두바이’가 벤치마크란다. 중구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은 신당동 ‘남산타운’으로 138㎡(41평형)가 8억7000만원. 중구의 스카이라인이 바뀌면 ‘집값 지도’도 뒤바뀔 것 같다.
을지로4가에서 30년 동안 조명기구를 팔아온 김승규(51) 씨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지금의 을지로, 충무로가 좋다. 을지로도 곧 고층빌딩 몫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중구에서 나고 자란 김승환(67) 씨는 “1970년대처럼 모든 걸 깨부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지금 충무로에서 영화는 축제다. 9월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제2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9월3~11일)가 개막했다. 영화의 거리를 다시금 파닥거리게 하고자 지난해 제1회가 열렸다. 올해 개막작은 ‘숨은 요새의 세 악인’(히구치 신지 감독/ 2008년). 개막식 사회는 동갑내기 박중훈(42), 강수연 씨가 맡았다.
중구는 컬처노믹스[culturenomics·문화(culture)+경제(economics)]의 첨병이 되길 소망한다. 과거와 현재가 어울린 쪽빛 미래를 꿈꾼다. 문화의 나라 조선에서 르네상스를 이끈 위항의 중인은 예술가이자 과학자, 기술자였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버텨내고 또 다른 도약을 예비하는 ‘2008년 9월의 중구’를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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