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의 냉각탑이 무너질 때 북한 관계자들의 표정에서 슬픔을 감지할 수 있었다.”
6월27일 북한 핵개발의 상징이던 평북 영변군 원자로의 냉각탑이 600t의 콘크리트로 변했다. 성 김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은 “(북한 기술자들이) 영변 핵시설에 상당한 수준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면서 “리용호 북핵 담보처장의 얼굴에서 감정 변화가 가장 또렷하게 나타났으며, 다른 북한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6자회담에 참가한 5개국 7개 언론사가 냉각탑 폭파 장면을 전 세계로 중계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 ‘미국에 굴복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든 존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북한이 의무사항을 준수한 것은 좋은 일보(good step)”라고 평가했다.
외교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에 영변 핵시설을 부수면 불능화 의지를 믿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미국이 이 제안을 바탕으로 냉각탑 폭파를 역제안했고 북한이 이를 수락하면서 이벤트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폭파 비용 250만 달러를 제공했다.”(뉴욕타임스)
평양과 워싱턴 실리 챙긴 냉각탑 폭파
평양과 워싱턴은 영변의 ‘쇼타임’을 기획하면서 각각 실리를 챙겼다. 북한의 올해 모토는 ‘인민생활 우선주의’. 군사적으로는 ‘강국’이 됐으니 ‘먹는 문제’를 해결해 강성대국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2012년까지 경제강국을 만들겠다”는 약속도 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쇼타임을 통해 국제사회의 경제지원을 이끌어내기가 수월해졌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대북 강경파의 비판을 들어왔다. 그 중심엔 협상파인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있었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국무부 안팎에서 공격받은 힐 차관보가 사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쇼타임을 통해 워싱턴은 협상파의 발목을 잡던 강경파의 목소리를 낮출 수 있었다.
워싱턴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및 북한-시리아 커넥션과 관련해 북한에 우회로를 제공하면서 핵 불능화 조치를 마무리한 것엔 미국 대선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가 ‘원자로의 스위치를 끄는’(동결) 수준인 데 반해 핵 불능화는 ‘되돌리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치적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식량 얻고 배상금 끌어낼 토대 마련
미국이 북-미 관계 개선을 서두르는 듯한 모습을 보인 데는 신밀월(新蜜月)로 상징되는 북-중 관계도 영향을 끼쳤다. 5월27~30일 중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홀대한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을 북한에 보내 신밀월을 다졌다.
“2003년 우방궈(吳邦國)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방북 시 5000만 달러짜리 대안친선유리공장 건설 지원이 있었듯, 이달 중순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 방북 때도 그냥 빈손으로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차오위즈 (喬禹智) 베이징대 조선경제연구소 주임, 6월29일자 ‘조선일보’ 칼럼 ‘봉남(封南)에 열중하고 있는 북한’ 중에서)
베이징의 한 대북소식통은 “시 부주석이 방북 선물로 50만t의 식량지원과 북-중 경협 활성화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북측 인사에게서 들었다. 중국은 ‘경제과학기술협정’의 틀에서 해마다 10만~ 15만t의 식량을 북한에 제공해왔다. 식량을 35만t 더 지원하기로 한 셈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은 중조일치(中朝一致·북한을 중국화한다는 뜻) 전략에 따라 50억 달러에 이르는 대북 경협자금을 준비해놓고 있다. 중국이 중조일치로 대표되는 ‘신조선전략’을 수립한 때는 2004년. 이 전략은 중국 공산당의 북한 담당 조직과 연구소가 총망라해 입안됐는데, 동북 3성과 북한을 하나로 묶어 개발한다는 게 골자다. 고구려 역사를 왜곡한 동북공정은 중조일치 전략의 액션 플랜 격이다.
올 봄 중국 런민은행(PBOC)은 지린성 옌볜자치주와 랴오닝성 단둥시에서 인민폐(위안화) 계좌를 통한 결제를 허가했다. 이는 중국 금융이 북한에 들어갈 토대를 만든 것으로, 경협자금이 북한에 들어갔을 때 이를 담보로 인민폐 베이스로 북한에 대출을 해주면 북한경제를 중국이 요리할 수 있게 된다. 중국은 ‘올림픽 이후’로 북한 경제 공략을 미뤄왔다고 한다.
베이징이 평양이라는 배가 미국 쪽으로 향하는 걸 원하지 않듯, 워싱턴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꺼린다. 중국은 4월 말 박의춘 북한 외무상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한마디로 “중국의 품에 안기라”는 뜻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미국은 다급해졌다. 미국은 식량지원을 앞당겼으며, 북한은 이에 화답하듯 성 김 과장에게 1만8822쪽에 이르는 핵 자료를 넘겼다(5월10일). 평양은 ‘미국 카드’로 중국을 다루고 ‘중국 카드’로 미국을 공략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북-미, 북-중 관계가 숨가쁘게 돌아가면서 일본도 숟가락을 얹었다. 북-일 수교 협상이 본궤도에 올랐는데 북한은 일본이 제공할 배상금 규모를 톺아본 뒤 일본 정부가 수교의 선결 조건으로 제시한 ‘납치문제’를 해결해줄 태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식민지배 배상금 규모로 최소 100억 달러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핵 불능화 조치를 마무리하면서 미국과 중국한테서 각각 50억t의 식량지원을 받아내고 일본의 배상금과 중국의 경협자금을 끌어낼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식량지원으로 추수 때까지 식량난을 덜 수 있게 됐다. 식량난과 관련한 절박함이 줄어든 셈이다. 통일부가 5월부터 북한에 “옥수수 받을 거요?”라고 물으면 북한은 “모르겠소” 혹은 “노 코멘트”로 답하다가 최근엔 “안 받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남조선의 쌀, 비료? 그런 태도로 나오면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한국은 평양의 봉남(封南)을 뚫을 지렛대를 마련하지 못했다. 북한이 거부 의사를 밝힌 “비핵개방3000 구상을 폐기하거나 수정하고 북한에 다가서야 한다”는 비둘기파의 주장과 “주민을 굶어 죽이면서도 자존심 운운하며 식량을 받지 않는 북한 정권을 규탄해야 한다”는 매파의 주장이 엇갈린다.
문제는 북한이 봉남을 결심한 만큼 이명박 정부가 돌파구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채찍을 들든 당근을 들든 평양은 봉남을 계속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한 북한전문가의 주장이다. 그는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서울이 방외인(方外人)으로 머무는 것은 중국의 조중일치 전략을 고려할 때 만시지탄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변의 쇼타임 이후에도 북-미·북-중·북-일 관계는 숨가쁘다. 중국은 올해 초부터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행사에 맞춰 ‘정상 외교’를 준비해왔다(‘주간동아’ 2월26일자·624호 ‘베이징올림픽 개막 전후로 북-미 정상회담 열리나’ 기사 참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개막식 초청을 사실상 수락했으며, 이 대통령도 베이징올림픽 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다.
시 부주석이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을 올림픽에 초청하면서 중국은 멍석 까는 일을 끝냈다. 김 위원장이 중국의 초청을 수락할지는 미지수다. 현재로선 ‘빅쇼’의 성사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북-미 관계의 변화에 따라 ‘압록강도 놀랄’ 이벤트가 벌어질 수도 있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에 맞춰 이명박-김정일-부시-후진타오가 만나거나 김정일-부시가 회담하면 한반도는 격변에 돌입한다.
부시 대통령은 8월 초 동아시아로 움직인다. 그는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참석에 앞서 8월5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한다. 미국은 당초 중국이 주인공이 되는 베이징에서의 빅쇼를 원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이 올림픽 개막식을 관람한 뒤 평양을 직접 방문하는 시나리오가 올해 초 정보기관 등에서 회자된 까닭이다.
개막식 불참 90% 그러나 1%가 사건 만들어
어떤 형태로든 부시-김정일 만남이 성사되려면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북이 이뤄져야 한다. 김정일-라이스의 만남은 북-미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사실상 연락사무소 구실을 하는 미국 외교관이 평양 고려호텔에 상주하고 있는데, 둘의 면담 결과에 따라 이 사무실은 정식 연락사무소 또는 대표부로 승격된다.
중국 주도의 빅 이벤트가 성사되려면 7월15일께 라이스 장관이 방북해야 한다. 7월8일부터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을 북한의 핵신고를 공인하면서 라이스 장관 방북의 명분을 만드는 계기로 활용한 뒤, 라이스 장관이 서울과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다는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시나리오는 시간이 촉박하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과 ‘북-미 정상회담’은 북핵문제 해결의 마지막 두 분수령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라이스 장관의 방북이 이뤄지는 수준에서 북-미 관계가 일단락되리라고 내다봤다. 북한이 핵신고에서 빠진 핵무기를 지렛대로 미국의 차기 행정부와 또 다른 거래를 벌이리라는 전망이 많다.
평양 사정에 정통한 한 대북전문가는 “나는 김 위원장이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90%가 넘는다고 본다. 북한이 부시 대통령 임기 내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할 가능성도 매우 낮다고 본다. 그러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은 1%의 확률에서도 이뤄지는 법이다. 8월8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지켜볼 일이다”라고 말했다.
6월27일 북한 핵개발의 상징이던 평북 영변군 원자로의 냉각탑이 600t의 콘크리트로 변했다. 성 김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은 “(북한 기술자들이) 영변 핵시설에 상당한 수준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면서 “리용호 북핵 담보처장의 얼굴에서 감정 변화가 가장 또렷하게 나타났으며, 다른 북한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6자회담에 참가한 5개국 7개 언론사가 냉각탑 폭파 장면을 전 세계로 중계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 ‘미국에 굴복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든 존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북한이 의무사항을 준수한 것은 좋은 일보(good step)”라고 평가했다.
외교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에 영변 핵시설을 부수면 불능화 의지를 믿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미국이 이 제안을 바탕으로 냉각탑 폭파를 역제안했고 북한이 이를 수락하면서 이벤트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폭파 비용 250만 달러를 제공했다.”(뉴욕타임스)
평양과 워싱턴 실리 챙긴 냉각탑 폭파
평양과 워싱턴은 영변의 ‘쇼타임’을 기획하면서 각각 실리를 챙겼다. 북한의 올해 모토는 ‘인민생활 우선주의’. 군사적으로는 ‘강국’이 됐으니 ‘먹는 문제’를 해결해 강성대국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2012년까지 경제강국을 만들겠다”는 약속도 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쇼타임을 통해 국제사회의 경제지원을 이끌어내기가 수월해졌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대북 강경파의 비판을 들어왔다. 그 중심엔 협상파인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있었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국무부 안팎에서 공격받은 힐 차관보가 사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쇼타임을 통해 워싱턴은 협상파의 발목을 잡던 강경파의 목소리를 낮출 수 있었다.
워싱턴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및 북한-시리아 커넥션과 관련해 북한에 우회로를 제공하면서 핵 불능화 조치를 마무리한 것엔 미국 대선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가 ‘원자로의 스위치를 끄는’(동결) 수준인 데 반해 핵 불능화는 ‘되돌리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치적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식량 얻고 배상금 끌어낼 토대 마련
미국이 북-미 관계 개선을 서두르는 듯한 모습을 보인 데는 신밀월(新蜜月)로 상징되는 북-중 관계도 영향을 끼쳤다. 5월27~30일 중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홀대한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을 북한에 보내 신밀월을 다졌다.
“2003년 우방궈(吳邦國)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방북 시 5000만 달러짜리 대안친선유리공장 건설 지원이 있었듯, 이달 중순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 방북 때도 그냥 빈손으로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차오위즈 (喬禹智) 베이징대 조선경제연구소 주임, 6월29일자 ‘조선일보’ 칼럼 ‘봉남(封南)에 열중하고 있는 북한’ 중에서)
베이징의 한 대북소식통은 “시 부주석이 방북 선물로 50만t의 식량지원과 북-중 경협 활성화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북측 인사에게서 들었다. 중국은 ‘경제과학기술협정’의 틀에서 해마다 10만~ 15만t의 식량을 북한에 제공해왔다. 식량을 35만t 더 지원하기로 한 셈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은 중조일치(中朝一致·북한을 중국화한다는 뜻) 전략에 따라 50억 달러에 이르는 대북 경협자금을 준비해놓고 있다. 중국이 중조일치로 대표되는 ‘신조선전략’을 수립한 때는 2004년. 이 전략은 중국 공산당의 북한 담당 조직과 연구소가 총망라해 입안됐는데, 동북 3성과 북한을 하나로 묶어 개발한다는 게 골자다. 고구려 역사를 왜곡한 동북공정은 중조일치 전략의 액션 플랜 격이다.
올 봄 중국 런민은행(PBOC)은 지린성 옌볜자치주와 랴오닝성 단둥시에서 인민폐(위안화) 계좌를 통한 결제를 허가했다. 이는 중국 금융이 북한에 들어갈 토대를 만든 것으로, 경협자금이 북한에 들어갔을 때 이를 담보로 인민폐 베이스로 북한에 대출을 해주면 북한경제를 중국이 요리할 수 있게 된다. 중국은 ‘올림픽 이후’로 북한 경제 공략을 미뤄왔다고 한다.
베이징이 평양이라는 배가 미국 쪽으로 향하는 걸 원하지 않듯, 워싱턴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꺼린다. 중국은 4월 말 박의춘 북한 외무상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한마디로 “중국의 품에 안기라”는 뜻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미국은 다급해졌다. 미국은 식량지원을 앞당겼으며, 북한은 이에 화답하듯 성 김 과장에게 1만8822쪽에 이르는 핵 자료를 넘겼다(5월10일). 평양은 ‘미국 카드’로 중국을 다루고 ‘중국 카드’로 미국을 공략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북-미, 북-중 관계가 숨가쁘게 돌아가면서 일본도 숟가락을 얹었다. 북-일 수교 협상이 본궤도에 올랐는데 북한은 일본이 제공할 배상금 규모를 톺아본 뒤 일본 정부가 수교의 선결 조건으로 제시한 ‘납치문제’를 해결해줄 태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식민지배 배상금 규모로 최소 100억 달러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핵 불능화 조치를 마무리하면서 미국과 중국한테서 각각 50억t의 식량지원을 받아내고 일본의 배상금과 중국의 경협자금을 끌어낼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식량지원으로 추수 때까지 식량난을 덜 수 있게 됐다. 식량난과 관련한 절박함이 줄어든 셈이다. 통일부가 5월부터 북한에 “옥수수 받을 거요?”라고 물으면 북한은 “모르겠소” 혹은 “노 코멘트”로 답하다가 최근엔 “안 받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남조선의 쌀, 비료? 그런 태도로 나오면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한국은 평양의 봉남(封南)을 뚫을 지렛대를 마련하지 못했다. 북한이 거부 의사를 밝힌 “비핵개방3000 구상을 폐기하거나 수정하고 북한에 다가서야 한다”는 비둘기파의 주장과 “주민을 굶어 죽이면서도 자존심 운운하며 식량을 받지 않는 북한 정권을 규탄해야 한다”는 매파의 주장이 엇갈린다.
문제는 북한이 봉남을 결심한 만큼 이명박 정부가 돌파구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채찍을 들든 당근을 들든 평양은 봉남을 계속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한 북한전문가의 주장이다. 그는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서울이 방외인(方外人)으로 머무는 것은 중국의 조중일치 전략을 고려할 때 만시지탄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변의 쇼타임 이후에도 북-미·북-중·북-일 관계는 숨가쁘다. 중국은 올해 초부터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행사에 맞춰 ‘정상 외교’를 준비해왔다(‘주간동아’ 2월26일자·624호 ‘베이징올림픽 개막 전후로 북-미 정상회담 열리나’ 기사 참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개막식 초청을 사실상 수락했으며, 이 대통령도 베이징올림픽 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다.
시 부주석이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을 올림픽에 초청하면서 중국은 멍석 까는 일을 끝냈다. 김 위원장이 중국의 초청을 수락할지는 미지수다. 현재로선 ‘빅쇼’의 성사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북-미 관계의 변화에 따라 ‘압록강도 놀랄’ 이벤트가 벌어질 수도 있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에 맞춰 이명박-김정일-부시-후진타오가 만나거나 김정일-부시가 회담하면 한반도는 격변에 돌입한다.
부시 대통령은 8월 초 동아시아로 움직인다. 그는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참석에 앞서 8월5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한다. 미국은 당초 중국이 주인공이 되는 베이징에서의 빅쇼를 원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이 올림픽 개막식을 관람한 뒤 평양을 직접 방문하는 시나리오가 올해 초 정보기관 등에서 회자된 까닭이다.
개막식 불참 90% 그러나 1%가 사건 만들어
어떤 형태로든 부시-김정일 만남이 성사되려면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북이 이뤄져야 한다. 김정일-라이스의 만남은 북-미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사실상 연락사무소 구실을 하는 미국 외교관이 평양 고려호텔에 상주하고 있는데, 둘의 면담 결과에 따라 이 사무실은 정식 연락사무소 또는 대표부로 승격된다.
중국 주도의 빅 이벤트가 성사되려면 7월15일께 라이스 장관이 방북해야 한다. 7월8일부터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을 북한의 핵신고를 공인하면서 라이스 장관 방북의 명분을 만드는 계기로 활용한 뒤, 라이스 장관이 서울과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다는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시나리오는 시간이 촉박하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과 ‘북-미 정상회담’은 북핵문제 해결의 마지막 두 분수령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라이스 장관의 방북이 이뤄지는 수준에서 북-미 관계가 일단락되리라고 내다봤다. 북한이 핵신고에서 빠진 핵무기를 지렛대로 미국의 차기 행정부와 또 다른 거래를 벌이리라는 전망이 많다.
평양 사정에 정통한 한 대북전문가는 “나는 김 위원장이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90%가 넘는다고 본다. 북한이 부시 대통령 임기 내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할 가능성도 매우 낮다고 본다. 그러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은 1%의 확률에서도 이뤄지는 법이다. 8월8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지켜볼 일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