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호이저와 함께 있는 미의 여신 비너스를 그린 독일의 벽화.
굳이 제국의 흥망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권력 가진 자가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경우는 많았다. 그런 경우 미인은 권력을 이용하고, 또 부리기도 했다. 권력의 시녀 된 자들이 궁정 의자 아래 엎드려 있는 동안, 궁정 안뜰에서는 권력을 소유하는 치맛자락이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룻밤 안에 베갯머리맡에서 이뤄내는 섭정(攝政)도 숱하게 있어왔다.
결론은 이렇다. 힘 있는 자가 권력을 쥐었다 말하지만, 사실 권력을 ‘품은’ 자가 더 힘이 있는 것이다. 천하를 쥔 자가 미인의 품 안에 있으므로 미인은 천하를 쥐곤 했다. 권력자는 아름다움까지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아름다움 그 자체에 유혹되는 게 아니다. 빌 클린턴을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의 성(性) 스캔들은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새로운 현상이 보인다. 아름다움이 권력 쥔 자의 소유이기 전에, 권력을 쥐려는 자를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미모의 대변인 전성시대’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미디어 시대의 우중(愚衆)정치에 아름다움이 활용되는 것이다.
권력이 미인을 활용하거나, 미모가 정치의 기득권에 도움이 된 예는 해외에도 많다. TV 앵커와 맞먹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국 백악관의 데이너 페리노 대변인, 사르코지 대통령의 맞수로 지난해 프랑스 대선을 치른 사회당의 세롤렌 루아얄 후보,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대선배’ 격인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1974년 세계 최초로 여성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과 마찬가지로 특출한 정치적 재능에 세련된 외모까지 갖췄다. 물론 시대가 그들을 반겼다는 점도 무시 못할 출세 요인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등을 필두로 해 세계는 점점 거세지는 정치계 우먼파워를 실감하는 중이다. 현재 전 세계에는 여성 총리가 4명, 여성 대통령이 9명이나 된다.
‘미모의 권력자’는 비단 여성만이 아니다. 오늘날 남성 정치인 중에는 자기 외모를 가꾸는 데 능숙한 프로도 많다. 엘리트라면 재색(才色)을 겸비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남성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또 이 땅의 ‘낡은’ 기성 정치인 선배들과 자신을 구별짓기 위해서라도 미모를 가꾸려는 젊은 정치인들이 있다. 이 엘리트들은 힘의 유혹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미모를 가지면 정치적 능력이 결핍됐다고 보는 구시대적 고정관념, 이제는 지워야 할 때다.
만인이 미모를 숭배하는데 어찌하리
아리따운 여성 대변인들을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으랴. 미모의 대변인들은 정치 미디어가 가진 생리에 따라 출현했을 따름이다. 권력은 미디어를 부릴 줄 안다. 그러나 정치가는 미디어를 따를 뿐이다.
한편으로 미디어는 사람들 마음 맨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용(龍)을 깨웠다. 가장 합리적인 듯 보이면서도 가장 야수적인, 감각적인 동시에 순응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시각효과이기 때문이다.
사회철학자 마틴 제이는 현대성의 가장 큰 특징을 시각중심주의에서 찾았다. 현대사회는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듣는 지혜를 갖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증명하려 한다. “예수의 손에 박힌 못 자국을 만져봐야만 부활을 인정하겠다”는 예수의 제자 도마의 경험주의가 현대사회에 이르러 부활한 셈이다.
근대적 이성주의가 ‘시각성’과 만난 뒤 세월이 흘러 TV와 인터넷 미디어가 등장했다. 이러한 전자미디어 시대에 시각중심주의는 초현대적 감각주의로 변화했다. 우리는 미디어 안에서 예쁜 이미지에 끌려 좌로 쏠리고 우로 몰려간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마음속 용이 제멋대로 아름다움을 찾아 미디어를 뒤지고 다닌다.
아름다운 아파레트르(Apparetre·외양)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사실 콤플렉스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자란 육체를 채우려는 듯 미모와 근육을 갈망한다. ‘이미지 소비사회’라며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을 즐기고 누린다. 국민, 위정자, 선거전략가, 미디어 종사자 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 모두가 미모의 여성 대변인을 좋아하고 그들의 출현을 즐긴다.
미모에 대한 숭배는 물신적(物神的)이기도 하고 병적 도착 같기도 하다. ‘뭐, 아무렴 어때’ 하고 달라진 세태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도 겉모습과 다른 속마음이 있겠지’라며 달관하는가 하면, ‘거스를 수 없는 이미지의 물결을 어찌하리’ 식으로 체념한다.
아마도 미모 숭배의 마지막 단계는 이런 상태가 아닐까. 연예오락 방송프로그램과 미디어 정치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시민들이 스스로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광적으로 노력하는 상태.
미인이 권력을 얻는 이유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권력과 아름다움의 관계는 달라졌다. 태고부터 권력과 아름다움은 결혼을 밥 먹듯 해왔다. 모든 역사가는 권력자에게 시집가는 미녀들에 대해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 상황이다. 미인이 권력을 취한다. 용자(勇者)가 미인을 얻는 시대에서 남녀를 불문한 미인들이 스스로 권세를 얻는 시대로 바뀌었다.
사회적 성공과 아름다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은 사회적 성공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한 시대의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적 관념을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부르는데, ‘미인들은 승승장구하는 법’이란 생각은 우리 마음속에 에피스테메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산업시대 이전에도 아름다움은 일종의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것이지, 쟁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는 ‘투자 대상’이다. 이제 성형수술은 새 옷을 사 입고 머리를 염색하고 화장을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됐다. 건강을 위해 요가를 하는 것처럼, 미모를 위해 지방을 흡출하거나 노화방지 시술을 받는다. 굳이 성형수술이 아니더라도 각종 미용 서비스와 값비싼 의상, 소품 등으로 누구나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아름다움이 곧 능력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시대가 됐다. 정성 들여 가꿀 수 있고, 또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됐다.
이제는 진위(眞僞)와 선악(善惡) 대신 미추(美醜)가 중요해진 시대다. 이는 결과로 증명하고, 물질로 승부하고, 돈으로 존경을 사는 현대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럴 때 아름다움은 치명적 재능을 넘어 차가운 능력이 되고, 그 자체가 권력이 된다.
아름다우면 권력이 쫓아온다
권력이 아름다움을 부르는 것- 즉 권력자가 미인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곧 권력인 시대다. 정치권력보다는 차라리 언론과 미디어가 얼마나 미모를 우대해왔는지를 본다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TV 앵커도 의사, 변호사, 여성 스포츠인도 예외가 아니다. 미디어는 용모를 취사선택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리하여 빼어난 아름다움은 권력의 수단을 넘어 권력이 목적하는 바가 돼버렸다.
TV와 인터넷은 이미 실생활과 다른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있다. 대중은 미모에 눈이 익었고, 팬들의 열정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권력이 됐다. 미디어에 잘 보이기 위해 권력이 아름다운 자태를 구하듯, 미인은 자신을 좋아하는 대중 앞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권력을 구한다. 이전에는 권력을 획득하면 동시에 아름다움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 개인이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아름다움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아름다움이 곧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재능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한때 아름다움은 일종의 명예였다. 도덕적 존재의 귀함과 같지는 않았지만, 시적(詩的) 찬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름다움은 명예 대신 부(富)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됐다. 미디어 앞에 선 권력이 목적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아름다움을 얻으려는 개인의 목적은 권력을 쟁취하는 데 있다.
어떤 아름다움은 부귀와 권세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움을 이용하려는 자가 아닐지라도 아름다우면 특권을 누리게 된다. 아름다움을 얻으면 권력이나 부가 부산물로 오는 세태를 살기 때문이다.
특권이란 가진 자의 전리품이다. 권력이나 부가 미를 특권으로 취하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이제는 미가 특권으로서 권력이나 부를 누리는 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