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수배를 받고 있는 살인범이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다 붙잡혔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 올해 서른 살인 남대현 씨다. 그러나 그는 -기존 언론보도가 간주했듯 - 흉악범이라기보다는 한순간의 실수로 생사(生死)의 기로에 놓인 인권 피해자다.
- 재외동포 인권 문제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한다. - 편집자 -
남대현 씨의 고교 시절 모습(원 안)과 경기도 자택에서 만난 그의 아버지.
“제 소망은 9년 전과 똑같습니다.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달라는 겁니다. 미국에 가면, 저는 알아요. 우리 아들은 죽습니다.”
99년 자수했다가 석방…“한국서 재판 가능한데 왜 안 해주나”
그의 아들 대현(30) 씨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신병 인도가 요청된 1급 살해 용의자다. 199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전직 경찰관이던 76세 노인을 권총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대현 씨는 앞으로 한국 법원의 인도재판을 거쳐 미국으로 보내질지 여부가 결정된다.
대현 씨는 미국에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에서 전자족쇄를 끊고 1998년 3월 한국으로 도피했다. 그가 한국 사법당국에 붙잡힌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99년 3월3일 그는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달라”며 경찰에 자수했다(‘주간동아’ 전신인 ‘뉴스플러스’ 1999년 3월25일자 기사 ‘한국서 재판받게 해주오’ 참조). 당시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이 발효되지 않은 때로, 한국 정부는 그를 미국에 보내는 대신 석방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정부는 대현 씨와, 아들의 자수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부친 남씨의 거듭된 요청에도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주지 않았다. 우리나라 형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내국민의 국외 범죄에 대해서도 재판 관할권을 갖는다. 당시 만 20세가 안 된 대현 씨는 이중국적자였다. “대현 씨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재판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아쉽다.” 당시 대현 씨 변호를 맡았던 박찬운 한양대 교수(국제인권법)의 회상이다.
남씨가 자신의 아들이 한국에서 재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아들이 미국으로 보내질 경우 사형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남씨는 미국 검찰이 처음부터 사형(Death Penalty)을 목표로 아들을 기소했다고 보고 있다. 공범들의 진술 외에는 물증이 없는데도 1급 살인혐의로 구속한 데다, 여러 차례 필라델피아 언론에 “사형선고를 받아내겠다”는 미국 검찰의 발언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미국 검찰은 대현 씨가 강도행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뒤 친구 3명을 데리고 피해자 집으로 가 현관문을 열다 피해자를 발견하고 총을 쏴 살해한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한편 공범들은 경찰과의 협상(Plea Bargaining)을 통해 살인사건을 자백하고 대현 씨를 주범으로 지목하면서 풀려났다. 남씨는 “인종차별적인 수사로 미국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미국 변호사도 사형 외에는 기대할 게 없다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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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적 수사로 미국서 공정한 재판 어렵다”
자수했던 아들이 풀려난 뒤 남씨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 부자(父子)의 고통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9년 12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이 발효되자 대현 씨는 검거를 두려워하며 숨어 사는 처지가 됐다. 남씨의 미국 생활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100만 달러(약 10억원)에 이르는 아들의 보석금 문제로 여러 차례 재판을 하다가 가산을 거의 탕진하게 됐다. 25년간 근무하며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주방용품 제조업체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재미교포였던 그는 재산도 명예도 지위도 자존심도 모두 잃고 2002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숨어 사는 9년 동안 대현 씨는 식당 종업원으로, 공장 직원으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자녀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생활비를 더 벌고자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잡힐까 싶어 결혼식은 올리지도 못했다. 세 명의 아이들 모두 아내 성(姓)을 따르게 했고, 아내 호적에 올렸다.
남씨는 석 달에 한 번씩 아들네를 찾았다. 아들 집으로 곧장 가는 법은 없었다. 혹시나 미행이 붙지 않을까 염려돼 서울로 올라가 창경궁 같은 곳에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엉뚱한 곳에 한 번 더 들르는 식으로 빙빙 돌아 아들 내외와 손자들을 만나러 갔다. 아들에게 전화 걸 일이 있을 때는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집 전화를 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노력이 모두 물거품 되고 아들이 체포된 현재 남씨가 가진 마지막 소망은 9년 전과 똑같다. 아들을 한국에서 재판받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범죄인인도법에 따르면 인도범죄의 성격과 범죄인이 처한 환경 등에 비춰 범죄인을 인도하는 것이 비인도적이라고 인정되는 경우 범죄인의 인도를 거절할 수 있다(제9조 5항). 만약 한국에서 재판이 열릴 경우 대현 씨에 대한 형량은 길어야 10년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10년 넘게 도피생활을 한 고통도 정상참작될 여지가 있다.
남씨의 다세대주택 집은 좁다.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모두 모인다면 더 좁게 느껴지겠지만, 그것보다 더 사치스러운 행복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종신형을 받는다 해도 면회 가서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미국으로 가면 그때부터는 영원히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잘못한 거 없다, 억울하다, 그건 아닙니다. 한국에서 재판받고 한국에서 죗값을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죽인다’는 미국 속담이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죄송하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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