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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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내면 사형… 제발 내 아들 살려주오”

국내 도피한 살인 용의자 남대현 씨 부친 ‘눈물의 하소연’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8-04-02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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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수배를 받고 있는 살인범이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다 붙잡혔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 올해 서른 살인 남대현 씨다. 그러나 그는 -기존 언론보도가 간주했듯 - 흉악범이라기보다는 한순간의 실수로 생사(生死)의 기로에 놓인 인권 피해자다.
    • 재외동포 인권 문제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한다. - 편집자 -
    “미국 보내면 사형… 제발 내 아들 살려주오”

    남대현 씨의 고교 시절 모습(원 안)과 경기도 자택에서 만난 그의 아버지.

    두세 평 되는 작은 방에 가구라고는 키 작은 서랍장과 낡은 TV가 고작이었다. 봄기운을 느끼게 하는 건 꽃무늬가 그려진 찻잔뿐, 집 안에는 봄날에 어울리는 웃음도 생기(生氣)도 없었다. 한때 미국 회사에서 부사장을 지낼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재미동포 남모(62) 씨 부부의 노년은 경기도 소도시의 어느 다세대주택에서 이렇듯 쓸쓸한 풍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씨는 ‘미국 FBI 수배 1급 살인범’의 아버지다.

    “제 소망은 9년 전과 똑같습니다.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달라는 겁니다. 미국에 가면, 저는 알아요. 우리 아들은 죽습니다.”

    99년 자수했다가 석방…“한국서 재판 가능한데 왜 안 해주나”

    그의 아들 대현(30) 씨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신병 인도가 요청된 1급 살해 용의자다. 199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전직 경찰관이던 76세 노인을 권총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대현 씨는 앞으로 한국 법원의 인도재판을 거쳐 미국으로 보내질지 여부가 결정된다.

    대현 씨는 미국에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에서 전자족쇄를 끊고 1998년 3월 한국으로 도피했다. 그가 한국 사법당국에 붙잡힌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99년 3월3일 그는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달라”며 경찰에 자수했다(‘주간동아’ 전신인 ‘뉴스플러스’ 1999년 3월25일자 기사 ‘한국서 재판받게 해주오’ 참조). 당시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이 발효되지 않은 때로, 한국 정부는 그를 미국에 보내는 대신 석방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정부는 대현 씨와, 아들의 자수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부친 남씨의 거듭된 요청에도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주지 않았다. 우리나라 형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내국민의 국외 범죄에 대해서도 재판 관할권을 갖는다. 당시 만 20세가 안 된 대현 씨는 이중국적자였다. “대현 씨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재판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아쉽다.” 당시 대현 씨 변호를 맡았던 박찬운 한양대 교수(국제인권법)의 회상이다.

    남씨가 자신의 아들이 한국에서 재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아들이 미국으로 보내질 경우 사형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남씨는 미국 검찰이 처음부터 사형(Death Penalty)을 목표로 아들을 기소했다고 보고 있다. 공범들의 진술 외에는 물증이 없는데도 1급 살인혐의로 구속한 데다, 여러 차례 필라델피아 언론에 “사형선고를 받아내겠다”는 미국 검찰의 발언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미국 검찰은 대현 씨가 강도행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뒤 친구 3명을 데리고 피해자 집으로 가 현관문을 열다 피해자를 발견하고 총을 쏴 살해한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한편 공범들은 경찰과의 협상(Plea Bargaining)을 통해 살인사건을 자백하고 대현 씨를 주범으로 지목하면서 풀려났다. 남씨는 “인종차별적인 수사로 미국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미국 변호사도 사형 외에는 기대할 게 없다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보기 "한국서 재판받게 해주오" 살인혐의로 FBI수배중인 남대현씨의 절규


    “인종차별적 수사로 미국서 공정한 재판 어렵다”

    자수했던 아들이 풀려난 뒤 남씨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 부자(父子)의 고통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9년 12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이 발효되자 대현 씨는 검거를 두려워하며 숨어 사는 처지가 됐다. 남씨의 미국 생활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100만 달러(약 10억원)에 이르는 아들의 보석금 문제로 여러 차례 재판을 하다가 가산을 거의 탕진하게 됐다. 25년간 근무하며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주방용품 제조업체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재미교포였던 그는 재산도 명예도 지위도 자존심도 모두 잃고 2002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숨어 사는 9년 동안 대현 씨는 식당 종업원으로, 공장 직원으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자녀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생활비를 더 벌고자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잡힐까 싶어 결혼식은 올리지도 못했다. 세 명의 아이들 모두 아내 성(姓)을 따르게 했고, 아내 호적에 올렸다.

    남씨는 석 달에 한 번씩 아들네를 찾았다. 아들 집으로 곧장 가는 법은 없었다. 혹시나 미행이 붙지 않을까 염려돼 서울로 올라가 창경궁 같은 곳에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엉뚱한 곳에 한 번 더 들르는 식으로 빙빙 돌아 아들 내외와 손자들을 만나러 갔다. 아들에게 전화 걸 일이 있을 때는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집 전화를 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노력이 모두 물거품 되고 아들이 체포된 현재 남씨가 가진 마지막 소망은 9년 전과 똑같다. 아들을 한국에서 재판받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범죄인인도법에 따르면 인도범죄의 성격과 범죄인이 처한 환경 등에 비춰 범죄인을 인도하는 것이 비인도적이라고 인정되는 경우 범죄인의 인도를 거절할 수 있다(제9조 5항). 만약 한국에서 재판이 열릴 경우 대현 씨에 대한 형량은 길어야 10년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10년 넘게 도피생활을 한 고통도 정상참작될 여지가 있다.

    남씨의 다세대주택 집은 좁다.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모두 모인다면 더 좁게 느껴지겠지만, 그것보다 더 사치스러운 행복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종신형을 받는다 해도 면회 가서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미국으로 가면 그때부터는 영원히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잘못한 거 없다, 억울하다, 그건 아닙니다. 한국에서 재판받고 한국에서 죗값을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죽인다’는 미국 속담이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죄송하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어링 사건’을 주목하라

    “사형은 비인도적” 판단…미국 소환 거부 선례


    미국에서 국제인권법을 전공한 박찬운 한양대 교수는 9년 전 남대현 씨의 사건을 맡게 된 계기로 1980년대에 있었던 ‘소어링 사건’을 언급했다. 소어링 사건이란 다음과 같다.

    1985년 3월 미국 버지니아대학에 재학 중이던 당시 19세의 젠스 소어링(Jens Soering)은 여자친구의 부모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잠적했다가 이듬해 4월 영국에서 체포됐다. 미국의 범죄인 인도 요청을 받은 영국은 인도 절차에 착수했으나 소어링은 미국에 보내질 경우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유럽인권재판소에 그 부당성을 호소했다. 이에 유럽인권재판소는 사형 자체뿐 아니라, 평균 6~8년에 이르는 미국의 사형집행 대기기간이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판단, 유럽인권협약이 밝히고 있는 소환금지 사안에 해당한다고 보고 미국으로의 인도는 이 협약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미국 버지니아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소어링을 미국으로 송환받을 수 있었다. 박 교수는 “유럽인권재판소는 미국의 사형제도가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보았다”며 “남대현 씨의 경우도 소어링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보기 "한국서 재판받게 해주오" 살인혐의로 FBI수배중인 남대현씨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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