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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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형식의 남녀관계 성적 욕망인가 사랑인가

  •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08-04-02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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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적 형식의 남녀관계 성적 욕망인가 사랑인가

    사랑의 상처를 밀도 있게 그린 연극 ‘블랙버드’. 추상미(왼쪽)와 최정우의 호연도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음식 찌꺼기와 쓰레기가 널려 있는 좁은 사무실, 남자와 여자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마주 서 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한창 신경전을 벌이던 중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남녀의 언쟁은 연방 여러 의문점을 남기는데, 그 물음표들을 따라가다 보면 두 사람의 과거가 낱낱이 드러난다.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꽤 있어 보이는 두 사람. 이들의 의문스러운 관계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두 살 소녀 우나와 마흔 살 레이의 만남

    우나(추상미 분)는 7시간 동안 운전해 레이(최정우 분)를 찾아왔다. 이름을 ‘피터’로 바꾸고 이사했음에도 우나가 레이의 거취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보게 된 인쇄물에서 그의 실루엣을 발견한 덕이다. 그 인쇄물은 바로 레이가 다니는 회사에서 배포한 카탈로그였다. 희미한 형체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레이의 모습은 우나의 안구 깊숙이 각인돼 있다. 레이는 그녀가 열두 살에 만났던 ‘첫 남자’였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15년 전, 우나의 집에서 있었던 바비큐 파티에서 일어난다. 마흔 살의 레이는 열두 살 우나에게 말을 걸고, 두 사람의 관계는 심상치 않게 발전해 급기야 둘이서 외딴 섬마을로 도주한다. 외딴섬의 모텔은 우나와 레이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장소. 섬에서 체포된 레이는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은 죄로 6년형을 선고받는다.

    15년이 지난 지금 우나가 레이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레이에게 섬마을에서의 일들에 대해 추궁한다. 당시 담배를 사러 간 레이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그를 찾기 위해 마을의 술집을 뒤지고 다녔고, 그러던 중 개를 산책시키던 남녀의 눈에 띄어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당신, 그때 왜 가버렸는지 꼭 알아야겠어요.” 우나의 이 말은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했던 것인지,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우나는 레이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한다. “몇 명의 소녀와 사귀어봤어요?” 이 질문 역시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는지, 버릇과 같은 욕정의 대상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레이는 우나의 질문에 늦은 답변을 한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술을 한잔 마시고 돌아와보니 그녀는 사라졌고, 라디오를 통해 어른들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레이의 알리바이는 잘 짜여 있었지만, 모두 우나가 이야기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의심받을 만하다. 또한 얼마나 많은 소녀들과 사귀었냐는 질문에 레이는 “다른 아이는 없었다”고 답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소녀 하나가 그를 찾아 사무실로 뛰어 들어온다.

    작품 제목인 ‘블랙버드(Blackbird)’는 새의 이름(찌르레기) 외에도 여러 의미를 지닌다. 수없이 리메이크된 명곡 ‘바이바이 블랙버드’에서처럼 ‘친한 친척이 사망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호주에서는 ‘섬사람들을 잡아다 인신매매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제목으로 봐서는 이 작품에 성적으로 학대받은 여인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짙게 묻어나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나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은 그녀를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하고 망신을 줬던 ‘주위의 시선’이지, 그녀 자신의 트라우마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83명과 섹스를 나눌 만큼 성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게다가 아직도 레이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기까지 한다. 실제 우나는 레이와 약간의 육체적인 접촉을 한다. 처음에 적대감을 드러내던 두 사람은 가족, 친구, 애인 등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츰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기억해내더니 쓰레기 더미를 던지고 밟으면서 공감대를 이루고, 내친김에 15년간 묵혀온 욕망을 들춰내며 바닥을 뒹구는 것이다.

    인간 심리의 쓰레기통 같은 이면 공개?

    시간이 갈수록 쓰레기가 더욱 엉망으로 흩어져가는 무대처럼, 이 연극은 시작할 때보다 더 복잡하게 감정이 얽혀버린 상태에서 막을 내린다. 극의 말미에 우나는 또다시 레이에게 매달리고 만다. 소녀와 함께 문을 나서는 레이를 막무가내로 따라나가는 그녀는 담배를 사러 간 그를 찾으러 뛰어나갔던 15년 전으로 돌아간 듯 보인다. 이는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수없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순환구조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 한 번의 무대 전환도 이뤄지지 않고 음향, 음악 효과도 거의 없이 배우들이 이끄는 긴장감만으로 극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화이트의 창백한 조명은 최소한으로 사용되고, 음향은 날카로운 소리와 자동차 엔진 소리가 전부다. 따라서 이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얼마나 능숙하게 극의 완급을 조절하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다소 건조한 면이 있지만 절제와 집중력을 잃지 않는 추상미의 연기와 자칫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 있는 유머를 재치 있게 넘기는 최정우의 연기는 극의 정서를 세련되게 전달한다.

    작가 데이비드 해로우어는 인터넷 채팅방에서 만난 열두 살의 스코틀랜드 소녀와 도망친 전 미국인 해병대원 토비 스투드베이커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다. 작가는 왜 굳이 ‘로리콘’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는가. 사실 우나와 레이가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과 이별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작가가 굳이 ‘로리콘’이라는 소재와 ‘블랙버드’라는 어두운 상징을 통해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극단적인 형식의 남녀관계를 통해 ‘사랑’으로 포장된 성적 욕망과 죄책감, 합리화와 기타 등등으로 뒤범벅된 인간 심리의 쓰레기통 같은 이면을 적나라하게 비추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5월25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문의 02-741-3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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